고사 성어

둥지가 부서지면 알이 성할 리가 없다는 故事成語 복소지란(復巢之卵)

박남량 narciso 2013. 12. 18. 13:45

둥지가 부서지면 알이 성할 리가 없다는 故事成語 복소지란(復巢之卵)








공융(孔融 153년 ~ 208년)은 중국 후한 말의 정치가로, 자는 문거(文擧)이며 예주(豫州) 노국(魯國) 사람이다. 공융(孔融)은 공자의 직계(直系) 자손으로 20대 손이라고 한다. 그는 어려서부터 남달리 총명했고 효성이 깊었으며, 여러 학문을 두루 익혀 박학다식했다. 젊은 시절부터 명성이 자자했다. 그의 명성은 권력자에 아부하지 않고 당당하게 할 말을 한 그 강직함 때문에 청사에 길이 남게 되었다.

나중에 대유(大儒)가 된 공융(孔融)의 어린시절의 이야기이다. 공융(孔融)이 열 살 무렵 아버지를 따라 경성에 왔다. 그 무렵 수도(首都)의 명망이 높은 지사(知事)인 이응(李應)은 그의 문하에 많은 빈객들이 드나들었다. 그러나 이응(李應)은 콧대가 높아서 보통 손님은 잘 만나주지 않고, "당대(當代)의 명사(名士)나, 친교(親交)가 있는 명망가(名望家)의 자제가 아니면 맞아들이지 말라." 고 문지기에 명하고 있었다.

공융(孔融)은 10세도 안 된 아이였지만 이 이야기를 전해 듣고, 이응(李應)이라는 사람이 과연 어떤 사람인가를 알고 싶어서 일부러 이응(李應)의 집을 방문하였다.

"저는 이가(李家)의 가문과 대대로 친교를 맺어온 명문 집안의 아이입니다." 하고 문지기에 말하여 안으로 안내되었다.
이응(李應)은 공융(孔融)을 알지 못하므로 "고명하신 조상님께서 일찍이 나와 친교가 있었느냐?" 하고 물었다.
"그렇습니다. 저의 선조인 공자(孔子)님과 아저씨의 선조인 노자(老子)와 덕(德)과 의(義)를 나란히 하셨으며, 공가(孔家)와 이가(李家)는 대대로 학자의 집안이므로 친교가 있는 집안이 아닐런지요."

공융(孔融)은 이응(李應)의 선조를 노자(老子)로 삼으며 치켜 세운 것이다. 성이 이씨(李氏)인 노자(老子)는 선진(先秦)시대의 사상가로서 공자(孔子)와 친교가 있었다. 이응(李應)은 물론 그 자리에 있던 사람들은 모두가 공융(孔融)의 당당하고 거침없는 응대와 영리함을 보고 모두들 감탐하며 칭찬하였다.

이때 궁중의 고문역인 진위(陳煒)가 뒤늦게 들어왔다. 동석하고 있던 사람들이 이 공융(孔融)이라는 아이가 꽤 영리하다고 말하자, 진위(陳煒)는 "어린 시절에 영리한 사람은, 어른이 되어서는 별로 유능하지 못하오." 하고 쌀쌀하게 말했다.

그러자 공융(孔融)이 진위(陳煒)에게 이렇게 되물었다. "말씀하신 게 사실이라면, 아저씨는 어린 시절에 아마 영리했을 거예요." 트집을 잡은 진위(陳煒)의 말에 공융(孔融)이 비꼬아 말한 것이다.

공융(孔融)은 삼국시대를 대표하는 비판적 지식인이었다. 해박한 지식에 조리 있는 논리. 그가 입을 열면 의론이 펄펄 일고 고관들을 비롯한 조정 내외의 모든 사람들이 그의 말에 귀를 기울였다. 그러나 남을 비판하기를 좋아하는 사람들이 실제로 중책을 맡고나면 의외로 무능함만 보여주는 경우가 많다. 입만 살아있고 실무경험이라곤 전무한 대부분의 비판적 지식인들이 이에 해당할 것이다. 공융(孔融)이 전형적인 사례였다.

그는 당대의 집권자들을 비판하고 조롱하기를 좋아했지만 그렇다고 군벌들을 물리치고 한실을 부흥하기 위한 분명한 방향이나 전략이 있는 것도 아니었다. 비판만 일삼아서는 제아무리 공융(孔融)처럼 당대의 지식인이라 해도 목숨을 부지하기 어려웠다. 공융(孔融)은 발해 태수 직에서 쫓겨났다가 당대 최고의 권력자 조조(曹操)를 거침없이 비판하고 조롱하다가 미움을 받아 목숨을 잃었다.

당시 공융(孔融)에게는 7세의 딸과 9세의 아들이 있었는데 아버지 공융(孔融)이 잡혀가던 날 그들은 바둑을 두고 있었다. 아버지가 잡혀가는 것을 바라보면서도 꼼짝하지 않고 묵묵히 바둑을 두었다. 사람들은 아이들이 아직 어려서 모르고 있다고 생각하고 빨리 도망가도록 말했다. 그러나 공융(孔融)의 딸은 매우 침착하게 오빠와 바둑을 두며 죽음을 기다렸다.

復巢之下  安有完卵  巢毁卵破  새집이 부서졌는데 어찌 알이 깨지지 않겠는가

후에 이 일을 보고 받은 조조(曹操)는  공융(孔融)의 아이들을 잡아오도록 하였다. 공융(孔融)의 딸은 자신들을 잡으러 온 사람들을 보고도 겁내지 않고 의연하였다. "죽은 뒤에도 혼령이 있어서 우리들이 부모님과 함께 있을 수 있다면 이 어찌 가장 즐거운 일이 아닌가." 말을 마치자 고개를 들고 참형 당했다. 어린 소녀의 당당함에 눈물을 흘리지 않은 사람이 없었다 한다.

공융(孔融)의 두 아이들이 한 말에서 유래되는 故事成語가 복소지란(復巢之卵) 이다.

故事成語
복소지란(復巢之卵)이란 둥지가 부서지면 알이 성할 리가 없다는 뜻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