큰 재목을 작게 쓴다는 고사성어 대재소용(大材小用)
남송(南宋)의 시인이자 정치가인 신기질(辛棄疾 1140-1207)은 본래 금(金)의 지배 아래 있던 산둥성 출신이었다. 그는 관직에 있을 때 다른 민족에게 빼앗긴 북방 지역의 땅을 되찾아야 한다고 강력히 주장하였다. 그러나 이러한 그의 태도는 다른 의견을 가진 많은 사람들에게 미움을 샀고 그는 관직에서 물러나게 되었다.
농촌으로 낙향한 신기질(辛棄疾)은 가헌(稼軒)이라는 초당을 짓고, 당대의 애국 시인 육유(陸游 1125-1210)와
교류하며 금나라 토벌의 꿈을 키워 갔다. 그러던 어느 날 한탁주(韓侂胄 1152-1207)라는 관리가 자신의
권력을 유지하기 위한 속셈으로 신기질(辛棄疾)을 절동(浙東) 안무사라는 관직을 맡겼다. 그의 나이 60을 넘어선 때였다.
그리고 이듬해에는 영종(寧宗)이 직접 그를 수도 임안(臨安)으로 불렀다. 금나라 토벌에 관한 이야기를 듣고 싶다는 것이었다. 그는 이 사실을 친구 육유(陸游)에게 알렸고, 육유(陸游)는 그를 격려하며 시 한 수를 지어 주었는데, 그 시(詩)에 '大材小用 큰 인재가 작은 일에 쓰여 예부터 탄식하는 바'였다는 구절이 있다.
수도 임안(臨安)으로 간 신기질(辛棄疾)은 북벌에 대한 의견을 적극적으로 개진했지만 한탁주(韓侂胄)는 단지 그의 명성만 이용하고 싶었을 뿐 그의 의견에는 별로 관심이 없었다. 그러나 황제의 이름을 빌려 부른 체면 때문에 그를 전장부(鎭江府) 지사에 임명하였다. 지사로서 그는 북벌의 실질적인 군비를 갖추어 가고, 금나라에 밀정을 보내 적정을 파악하는 등 실지
회복의 준비를 서둘렀지만, 한탁주(韓侂胄)는 큰소리만 칠 뿐 북벌을 한담의 꽃으로만 삼아 진실하게 대처하려고 하지 않았다.
그러다가 실질적인 북벌을 강조하는 신기질(辛棄疾)마저 면직시켜 버렸다. 그 후 한탁주(韓侂胄)는 북벌 작전에서 대패의 쓴맛을 보게 되고, 다시 신기질(辛棄疾)을 찾았지만 그때는 이미 신기질(辛棄疾)이 병석에 누워 출사를 할 수 없었다.
육유(陸游)의 시(詩)에서 유래된 고사성어가 대재소용(大材小用)이다.
대재소용(大材小用)이란 큰 재목을 작게 쓴다는 뜻으로 큰 인재가 작은 일에 쓰이는 것을 비유할 때 쓰는 표현이다. 조직이나 단체에서 큰 능력을 가진 사람에게 그 능력에 맞지 않는 작은 일을 맡기는 것을 말한다. 사람을 쓰는 법이 잘못되었음을 가리키는 말이다.<꽃사진: 풍노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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