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사 성어

천하명옥(天下名玉)을 이르는 고사성어 화씨지벽(和氏之璧)

박남량 narciso 2015. 7. 20. 11:40


천하명옥(天下名玉)을 이르는 고사성어 화씨지벽(和氏之璧)



전국 시대 초(楚)나라에 변화씨(卞和氏)란 사람이 산 속에서 옥(玉)의 원석을 발견하자 곧바로 여왕에게 바쳤다. 여왕이 보석 세공인(細工人)에게 감정시켜 보니 보통 돌이라고 한다. 화가 난 여왕은 변화씨(卞和氏)를 발뒤꿈치를 자르는 형벌인 월형에 처했다. 여왕이 죽은 뒤 변화씨(卞和氏)는 그 옥돌을 무왕(武王)에게 바쳤으나 결과는 마찬가지였다. 이번에는 왼쪽 발뒤꿈치를 잘리고 말았다.

무왕(武王)에 이어 문왕(文王)이 즉위하자 변화씨(卞和氏)는 그 옥돌을 안고 초(楚)나라 산 밑에서 사흘 낮 사흘 밤을 울었다. 문왕(文王)이 그 까닭을 묻고 옥돌을 세공인에게 맡겨 갈고 닦아 본 결과 천하에 둘도 없는 명옥으로 영롱한모습을 드러냈다.

문왕(文王)은 곧 변화씨(卞和氏)에게 많은 상을 내리고 그의 이름을 따서 이 명옥을 화씨지벽(和氏之璧)이라 명명했다. 그 후 화씨지벽(和氏之璧)은 조(趙)나라 혜문왕(惠文王)의 손에 들어갔다.

진(秦)나라 소양왕(昭襄王)은 조(趙)나라 혜문왕(惠文王)이 가지고 있는 천하명옥(天下名玉)이 탐이 났다. 그래서 조나라에 사신을 보내 15개의 성(城)과 맞바꾸자고 제의를 했다. 혜문왕(惠文王)에게는 실로 난처한 문제였다. 제의를 거절하면 당장 쳐들어 올 것이고 천하명옥(天下名玉)을 넘겨주면 그냥 빼앗아 버릴 게 뻔했기 때문이다.

혜문왕(惠文王)은 이 제의를 받아들이기로 하고 지모와 담력이 뛰어난 인상여(藺相如)에게 맡기기로 했다.  진(秦)나라로 간 인상여(藺相如)는 소양왕(昭襄王)에게 화씨지벽(和氏之璧)을 바쳤다. 화씨지벽(和氏之璧)을 살펴보던 소양왕(昭襄王)은 감탄하여 희색이 만면하였으나 약속한 15개의 성(城)에 대해서는 한 마디도 내비치지 않았다.

이런 일이 있으리라고 예상했던 인상여(藺相如)는 화씨지벽(和氏之璧)의 흠집을 일러주겠다고 돌려받아 본래 약속대로 이행할 것을 요구한다. 그러나 소양왕(昭襄王)이 듣지 않아 인상여(藺相如)는 화씨지벽(和氏之璧)을 부하에게 넘겨주고 부하를 서둘러 귀국시켰다. 뒤늦게 이 사실을 안 소양왕(昭襄王)은 당장 인상여(藺相如)를 잡아죽이고 싶었으나 많은 사람들의 비난이 무서워 그대로 돌려보냈다.


한비자(韓非子)의 변화(卞和)편에서 유래되는 고사성어가 화씨지벽(和氏之璧)이다.

화씨지벽(和氏之璧)이란  화씨(和氏)의 구슬이란 뜻으로 천하의 유명한 옥(玉)을 이르는 말이다. 화씨지벽(和氏之璧)을 연성지벽(連城之壁)이라고도 불렀다. 화씨지벽(和氏之璧)은 야광주(夜光珠)로서 구슬이 있는 백보 안에는 파리와 벌레가 들어오지 못하고 여름철에는 부채가 필요치 않았기 때문에 유명했다고 전한다.

화씨지벽(和氏之璧)을 가지고 진(秦)나라에 갔던 인상여(藺相如)가 천하의 보옥을 그냥 뺏길 뻔한 것을 기지로 흠집 하나 없이 온전히 가지고 돌아왔다고 하여 생긴 고사성어가 완벽(完璧)이다.

진(秦) 26년 초(楚)를 멸망시키고 이 옥(玉)을 얻은 시황제(始皇帝)는 옥공(玉工)으로 하여금 도장을 깎게하고 재상 이사(李斯)에게 여덟 자를 새겨 처음 옥쇄로 사용하였다.

『受命於天  旣壽永昌  명을 하늘로부터 받았으니 오래가고 크게 번창하리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