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혜와 슬기를 얻은 사람은 행복합니다
우리는 귀한 것과 가치 있는 것 그리고 영속적인 것과 그렇지 못한 것들을 너무 쉽게 구분하고 판단합니다. 그러나 알아서 구별하는 능력은 현상을 보는 눈만으로는 부족합니다. 현상의 이면에 숨어 있는 본질을 보는 눈이 함께 있어야 하기 때문입니다. 왜 본질을 보지 못할까요? 욕심이 마음을 채우고 있는 탓입니다.
아산 고을 큰 나무 위에 학이 살고 있었습니다. 어미학이 알을 채 까기도 전에 마을의 아이가 알을 가지고 놀다가 깨뜨리고 말았습니다. 그런데 새끼의 깃털이 이미 나 있었으므로 마을 늙은이가 아이를 꾸짖고 둥우리에 도로 갖다 놓았습니다. 어미학은 알이 깨진 것을 보고 서러워 울더니 어딘가 멀리 날아갔다가 사흘 후에 돌아왔는데 신기하게도 학의 새끼는 다시 살아났습니다.
마을 늙은이가 이를 이상히 여겨 둥우리에 가 보니 둥우리 가운데에 푸른 돌이 놓여 있었습니다. 그 돌은 밝게 비치어 가히 사랑스러우므로 늙은이는 그것을 가져다 상자에 넣어두었습니다. 그런데 관청의 무사로 있던 늙은이의 아들이 종사관으로 중국 연경에 가서 그 돌을 시장에 내놓았습니다. 구경하던 중국인들이 기이하게 생각하며 물었습니다.
"어디서 이 돌을 얻었소?"
"학의 둥우리에서 얻었소."
그러자 한 중국인 천 금으로 사기를 청하였습니다.
"지금 돈이 모자라서 살 수 없으니 원컨데 잘 싸두었다가 며칠 후 내게 주시오."
무사는 크게 기뻐하며 그 돌을 맑은 물에 씻고 모래로 때를 닦아냈더니 앵욕새의 눈 같은 흔적이 있으므로 그 흔적을 가아 없애 버렸습니다. 그리고는 비단으로 보자기를 만들어 겹겹이 싸고 나무로 만든 궤에다 넣고 자물쇠로 봉하였습니다. 얼마 후 중국인이 돈을 구해 가지고 왔습니다. 그는 궤를 열어보고는 깜짝 놀랐습니다.
"이 돌이 며칠 사이에 정기를 잃어 이제는 쓸 데가 없어졌으니 한 조각 깨진 그릇과 무엇이 다르리오."
"어찌 그러하오?"
"이 돌은 서해 사막 지역에서 나고 이름이 환혼석(還魂石)이지요. 죽은 사람도 품에 두면 즉시 살아나는 영험한 돌이오. 하지만 잉제 그 눈을 버려 정기를 잃었으니 어디에 쓰리오. 참으로 아깝구나! 비록 천하에 없는 보배라 할지라도 인력으로는 만들지 못하는 법. 쓸모없는 구경만 하였소."
중국인은 그렇게 말하고는 혀를 끌끌 차며 십 금을 내놓았다. 무사는 크게 한탄할 수밖에 없었다.
어우당(於于堂) 유몽인(柳夢寅 1559-1623)은 조선 선조 때 문장가이자 외교가로써 명성을 떨쳤습니다. 일반적으로 조선후기 야담류(野談類)의 효시(嚆矢)라고 일컬어지는 유몽인(柳夢寅)의 <어우야담(於于野談)>에 실린 글입니다.
부족함이 많은 인간이기에 더 바라고 더 갖기를 원하는 욕구는 끝이 없는 듯 합니다. 어느 하나를 원하다 얻게 되면 그 얻은 것에 감사하는 마음은 짧은 여운으로 자리하고 또 다른 하나를 원하고 더 많이 바라게 되는 것 같습니다. 바로 탐욕입니다. 사람의 마음속에서 양심이 이상하게 꺾여 다가올 미래에 엄청난 그 무엇이 있는 것처럼 욕심을 품게 되는 것을 말합니다.
믿을 수 없는 희망을 말합니다. 늙은이의 아들은 돌을 팔 생각이 앞섰기에 돌의 진정한 본질은 볼 수가 없었습니다. 지혜란 사물의 본질을 보는 데서 출발합니다. 그리고 중요한 것은 그 본질을 보기 위해서 마음을 비워야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마음을 비우는 것이 쉽지 않습니다. 채근담(菜根談)에서 이렇게 일깨워주고 있습니다.
"心不可不虛(심불가불허) 虛則義理來居(허즉의리래거)
마음은 비어 있지 않으면 안 되니 비어 있어야 정의와 진리가 그곳에 와서 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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