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의 묵상

인간은 지식과 자아의식 그리고 타인을 의식하게 되는 이성을 지녔습니다

박남량 narciso 2018. 4. 19. 13:42


인간은 지식과 자아의식 그리고 타인을 의식하게 되는 이성을 지녔습니다



나는 암탉 한 마리를 길렀습니다. 성품이 매우 자애로운 그 닭은 먼저 태어난 병아리와 나중 태어난 병아리를 함께 먹이고 있었습니다. 먼저 태어난 큰 병아리는 몸에 겨우 깃이 나 있었고, 나중 태어난 작은 병아리는 아직 솜털뿐이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밤, 어미닭이 그만 들짐승의 먹이가 되고 말았고, 큰 병아리도 온 몸에 상처를 입어 모이도 제대로 쪼지 못할 정도가 되었습니다. 나중 태어난 아기병아리는 삐약거리면서 몹시 애타게 어미를 찾았습니다. 그러자 상처 입은 큰 병아리가 자기 상처는 돌보지 않고 아기 병아리를 온 몸으로 품어주는 것이었습니다.

집안 사람들은 처음엔 우연이려니 하였습니다. 하지만 그날 이후 큰 병아리는 먹이를 보면 반드시 아기 병아리를 부르고 마당을 돌아다닐 때는 깃을 벌려 환란을 막아주기도 하였습니다. 그렇게 큰 병아리와 작은 병아리가 서로 자애하고 따르는 것이 흡사 어미와 새끼 같았습니다.

때마침 큰 장마가 두어 달 계속되자 큰 병아리는 두 깃으로 아기 병아리를 덮어 비에 젖지 않게 해주려고 하였습니다. 하지만 몸도 작고 깃도 짧아서 몸을 굽히고 앉을 수가 없었기 때문에 큰 병아리는 밤새도록 꼿꼿이 서 있어야만 했습니다.

이러기를 여름부터 가을까지 계속하니 보는 이마다 감탄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이에 큰 병아리의 이름을 '우계(友鷄)'라 지어주고 사람들이 옳지 못한 행실을 할 때마다 "우계(友鷄)를 보아라."고 하였습니다. 그러면 그때마다 부끄러워하지 않는 이가 없었습니다. 마침내 아기 병아리는 자라서 크기가 주먹만해졌습니다. 하지만 우계(友鷄)는 여전히 작고 마른 모습 그대로였습니다. 그런데도 변함없이 먹이고 덮어주다가 결국은 병이 들고 말았습니다.

사람들은 이를 보고 밤이슬을 맞아가며 아기 병아리를 기르느라 애쓴 때문이라고 생각하며 큰 병아리를 너나 없이 측은하게 여겼습니다. 그런데 칠혹같이 어두운 밤에 들짐승이 큰 병아리를 몰래 채가고 말았습니다.

집안 사람들이 쫓아갔지만 산길에서 부러진 깃털만 찾아내었을 뿐이었습니다. 나는 마침 외출에서 돌아와 그 말을 듣고 하마터면 눈물을 쏟을 뻔했습니다. 혹시 잔해라도 남은 것이 없나 하고 산길을 두루 찾아보았지만 부러진 깃털 외에는 아무 것도 보이지 않았습니다. 나는 결국 산길에 떨어진 깃털을 모아 상자에 넣어 산에다 묻고는 '우계총((友鷄塚)'이라는 이름 붙여주었습니다.


형 이잠(李潛)이 세자를 보호해야 한다는 상소를 올렸다가 국문을 받는 도중 숨지자 벼슬을 단념하고 일생 학문과 제자 양성에만 전념한 조선 후기 실학자인 성호(星湖) 이익(李瀷 1681-1763)의 문집인 성호집(星湖集)에 실린 우계전(友鷄傳)이라는 글입니다.

이 글은 닭의 행동을 통해 사람들이 본받을 만한 품성에 관해 논하고 있습니다. 암탉의 우애를 지켜본 경험을 통해 인간들의 가식적인 인간관계를 우회적으로 비판하면서 선한 품성을 지녀야 한다는 교훈을 주는 한문수필입니다. 성호(星湖) 이익(李瀷)은 이 이야기의 말미에 이렇게 덧붙이고 있습니다.

"내가 듣기로 태어나면서부터 아는 것은 성인이라고 하였는데 그렇다면 이 동물은 성인이었을까? 이 가여운 짐승은 공적을 이루고도 자신은 보답을 받지 못하고 죽었다. 어쩌면 이는 이치에 통달함을 부여받았으나 운수를 각박하게 만난 것이라 할 수도 있다. 남들은 이 병아리의 이야기를 예사롭게 여길 수도 있겠지만 내가 보기엔 사람과 만물이 서로 엇비슷함이 많다. 그런 까닭에 길가에 우계(友鷄)의 무덤을 만들어 오가는 이에게 이를 보게 하노라."

간디의 말입니다.
"어떤 시인이 말하기를 지식 없는 인간은 동물과 같다고 하였다. 그 지식이란 무엇인가? 사람으로 하여금 자아를 알 수 있게 하는 것만이 지식이다. 다른 말로 지식은 자아 실현을 뜻한다." <부산통일아시아공원 앞 등대 방파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