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정광필의 아량과 지혜 - 반성할 기회를 주어라
조선 중기 영의정을 지낸 정광필은 연산군 갑자사화에 왕에게 극력 간하다가 귀양갔다 중종반정으로 부재학에 복직, 이조참판. 예조 판서. 대사헌을 거쳐 우참찬으로 전라도 도순찰사가 되어 삼포왜란을 수습한 후 우의정, 좌의정을 거쳐 영의정에 오른 명재상이었다.
중종 기묘사화 때 조광조를 구하려다가 파직 그 후 다시 좌의정에 이어 영의정에 올랐으나 실권은 좌의정 심정에게 있었는데 세자를 저주한 사건이 일어나자 면직되었다. 그 후 총호사로서 장경왕후의 희능을 불길한 땅에 만들었다는 김안로의 무고로 김해에 귀양갔다가 김안로가 사사 되자 곧 풀려나왔지만 이때 영의정 윤은보, 좌의정 홍언필에 의해 영의정으로 추천되었으나 과거의 영의정으로서 조광조를 구하지 못하고 심정의 죄를 바로잡지 못하였으며 장경왕후의 희릉이 나쁜줄 알면서 묵인했다는 이유로 중종이 영의정으로 거절하여 영중추부사로 죽었다.
중종 때 정광필이 암행어사로 진도에 내려갔을 때 일이다. 그는 백성들의 원성을 듣고 군수의 부정을 눈치챘지만 일부러 주막에 머물면서 동헌으로 들어가지 않았다. 주막에 들렀던 사람들은 그가 보통사람은 아닌 것 같아 관아에 이 사실을 알리니 군수는 암행어사가 분명하다고 판단하고는 밤을 새워 어사출두에 대비했다.
다음 날 느지막하게 동헌에 들어온 정광필은 어사출두는 하지 않고 군수에게 너 이 숟가락으로 밥 떠먹듯이 얼마나 많이 백성의 재물을 빼앗아 먹었느냐 하고는 단지 은수저 몇 개를 압수해 돌아갔다. 군수는 비로소 잘못을 깨닫고 바로 잡으려고 했지만 얼마 후 결국 파직되고 말았다.
나중에 사람들이 주막에서 묵지 않고 바로 출두했다면 군수의 죄가 더 무거웠을 것이라고 하자 정광필은 그 군수가 백성들을 다스리는 도리를 몰라 탐욕을 부렸으니 만약 그 죄상을 다 밝힌다면 죽음을 면하지 못했겠지, 그렇게 되면 군수뿐 아니라 다치는 사람이 많을 테니 짐짓 하룻밤 묵으면서 여유를 준 것이네. 라고 말했다.
군수에게 무조건 벌을 내리는 것이 아니라 잘못을 반성할 길을 즉 개과천선의 길을 열어 준 정광필의 넉넉한 아량과 지혜에 사람들은 감복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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