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무신을 거꾸로 신지 않은 설씨녀(薛氏女) 이야기
설씨녀는 경주 율리의 평민 집의 여자였다. 비록 빈한하고 외로운 집안이었으나 용모가 단정하고 뜻과 행실이 잘 닦아졌다. 보는 사람들이 그 고운 자태를 흠모하지 않는 이가 없었으나 감히 가까이 하지 못하였다.
진평왕 때의 일이다. 그녀 아버지는 나이가 많았으나 정곡으로 국방을 지키는 수자리 당번을 가야 하였는데 그 딸은 아버지가 병으로 쇠약하여졌으므로 차마 멀리 보낼 수 없었고 또 자신은 여자의 몸이라서 아버지 대신 갈 수도 없었으므로 근심과 고민을 하고 있었다.
그때 가실이라는 청년이 일찍이 설씨를 좋아하였으나 감히 말을 하지 못하다가 그녀의 아버지가 늙은 나이에 군대에 나가야 함을 걱정하고 있다는 소식을 듣고 설씨에게 청하여 말하였다. 「 원컨대 이 몸으로 아버지의 일을 대신케 하여 주시오!」 설씨가 대단히 기뻐하여 들어가 아버지에게 이를 고하니 그녀의 아버지가 그를 불러 보고 말하였다. 「 이 늙은이가 가야 할 일을 그대가 대신하여 주겠다 하니 기쁘면서도 두려움을 금할 수 없소! 보답할 바를 생각하여 보니 만약 그대가 우리 딸이 어리석고 가난하다고 버리지 않는다면 그대의 수발을 받들도록 하겠소.」
가실이 물러가 혼인 날을 청하니 설씨가 말하였다. 「 혼인은 인간의 큰 일인데 갑작스럽게 할 수는 없습니다. 제가 이미 마음으로 허락하였으니 이는 죽어도 변함이 없을 것입니다. 그대가 수자리 당번을 나갔다가 돌아온 후에 날을 잡아 예를 올려도 늦지 않을 것입니다.」 이에 거울을 둘로 쪼개어 각각 한 쪽씩 갖고 이는 신표로 삼는 것이니 후일 합쳐 보자고 하였다.
가실과 설씨녀는 작별을 하였다. 그런데 마침 나라에 변고가 있어 가실은 다른 사람으로 교대를 하지 못하여 어언 6 년이 지나도록 돌아오지 못하였다. 어느 날 설씨녀의 아버지가 딸에게 말하기를 처음에 3 년으로 기약을 하였는데 이미 그 기한이 넘었으니 다른 집으로 시집을 가야 하겠다 하니 설씨녀는 말했다. 「 지난 번에 아버지를 편안히 하여 드리기 위해 가실과 굳게 약속하였습니다. 가실이 이를 믿고 군대에 나가 몇 년동안 굶주림과 추위에 고생이 심할 것이고 더구나 적지에 가까이 있어 손에서 무기를 놓지 못하여 마치 호랑이 입 앞에 가까이 있는 것 같아 걱정할 것인데 신의를 버리고 한 말을 지키지 않는다면 어찌 인정이리요? 아버지 명을 좇을 수 없으니 다시는 그런 말을 하지 마십시오.」
그러나 그 아버지는 늙고 늙어 그 딸이 장성하였는데도 짝을 짓지 못하였다 하여 억지로 시집을 보내려고 동네 사람과 몰래 혼인을 약속하였다. 결혼 날이 되자 혼인을 약속한 사람을 끌어들이니 설씨가 몰래 도망을 치려 하였으나 뜻을 이루지 못하였다. 마구간에 가서 가실이 남겨두고 간 말을 쳐다보면서 크게 탄식하고 눈물을 흘리고 있었다.
그때 마침 가실이 돌아왔다. 가실이 앞에 나아가 깨진 거울 한 쪽을 던지니 설씨가 이를 주워 들고 흐느껴 울었다. 아버지와 집안 사람이 기뻐하여 어쩔 줄 몰랐다. 드디어 후일 서로 함께 결혼을 언약하여 해로하였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