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보고와 한 많은 죽음
신라 무장 국제무역가 장보고의 본명은 궁복이다. 궁복은 천한 신분의 출신으로 원래 뱃사공이었으므로 장사꾼과 더불어 당나라나 일본을 자주 드나들었다. 그러는 동안에 자신의 신분이 신라에서는 어떤 미래도 약속할 수가 없어 어릴 적 친구인 정년과 함께 당나라로 건너가 군대에 지원하여 무령군 장교가 되었다. 무령군 장교는 당나라 사람들도 오르기 힘든 지위로서 상당한 군사 지휘권을 가진 직책이었다.
소문을 듣고 신라 흥덕왕이 사람을 보내어 궁복을 신라로 불러들여 장군 예우를 하려 하였으나 미천한 신분이라면서 신하들의 반대에 부딪혀 궁복은 신라 장군에 오르지 못하게 되었다. 그 무렵 신라 서해에는 당나라 해적들이 신라 해안에 출몰해 주민들을 붙잡아 중국에 노예로 팔아 넘기고 있었다. 궁복은 해적들의 소행을 그냥 지켜 볼 수 없었다. 그래서 왕에게 남해 해상교통의 요지인 완도에 해군기지를 건설하여 무역로를 보호하고 해적을 근절시킬 것을 주청하였다.
그리하여 어명을 받게 된 궁복은 지금의 완도에 청해진을, 남양에 당선진을 강화도에 혈구진을 치고 나라에서 내린 청해진대사라는 벼슬로 청해진에서 지휘를 했다. 이때 궁복은 자신의 이름을 장보고로 고쳤다.
장보고는 역시 타고난 무사였다. 독자적 세력으로 해적을 완전 소탕하여 동북아시아 일대의 해상무역권을 장악하고 당나라, 신라, 일본을 잇는 국제무역을 주도해 국제정치적 영향력을 크게 발휘하였다.
그 무렵 흥덕왕이 죽자 그에게는 대를 이을 아들이 없던 관계로 신라조정은 왕권 쟁탈로 얼룩져 있었다. 왕위계승분쟁에 패배한 김우징이 아들 경응과 함께 청해진으로 피난해 와 장보고에게 의탁하였다. 장보고는 김우징을 도와 환궁하는 날이 오면 귀족이 될 수 있으리라 생각하고 있었다.
장보고는 난화라는 딸과 살고 있었는데 김우징의 아들 경응과 장보고의 딸 난화는 장래를 약속하는 사이가 되었다. 당시 신라 조정에는 또 왕위를 둘러싼 분쟁이 생겨 희강왕이 자살하고 민애왕이 즉위하였는데 그 혼란을 틈타 장보고와 그의 군사들이 김우징을 왕위에 오르게 하는 데 큰 공을 세웠다. 그가 신무왕이다. 김우징의 승리와 영광은 장보고의 공이었다. 그러나 귀족이 아니라는 이유 때문에 장보고에게는 큰 벼슬이 내리지 않았다.
신무왕은 임금 자리에 오른 지 7개월 만에 병을 얻어 저승으로 떠나고 말았다. 그의 아들 경응이 뒤를 이으니 그가 문성왕이다. 장보고는 문성왕에 의하여 진해장군이 되었다. 문성왕은 옛날의 약속을 지키기 위해 장보고의 딸을 왕비로 맞으려 하였으나 왕족과 귀족들이 기를 쓰고 반대를 했다. 딸 난화가 신분 때문에 왕비가 될 수 없다는 결정이 난 것을 안 장보고는 분노를 참지 못해 군사들에게 출정명령을 내리는데 불안을 느낀 조정에서 자객 염장을 보내었다. 염장은 현재의 문성왕이 청해진에 머물 때 장보고와 잘 아는 사이였다. 장보고는 신의를 지켜 반갑게 대접하였으나 염장은 장보고를 살해한 것이다. 딸이 왕비가 되는 날을 기다리며 세월을 참고 기다린 해상왕 장보고는 이렇게 한 많은 일생을 마치고 말았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