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 산책

우리 미술관 옛그림 - 혜산(蕙山) 유숙(劉淑)의 오수삼매(午睡三昧)

박남량 narciso 2018. 4. 16. 15:29


우리 미술관 옛그림


혜산(蕙山) 유숙(劉淑 1827-1873)  오수삼매(午睡三昧)


혜산(蕙山) 유숙(劉淑 1827-1873)의 오수삼매(午睡三昧)라는 그림입니다. 혜산(蕙山)유숙(劉淑)은 조선 말기의 화원으로서 산수화를 비롯하여 꽃, 새 등을 정묘하고 아름답게 잘 그렸다고 합니다. 19세기 중엽 화단에는 풍속화와 진경산수화가 남종문인화의 바람에 떠밀려 쇠퇴기에 접어들었습니다. 새로운 물결이 출렁이는 시기 그 중심에 화가 유숙(劉淑)이 있었습니다. 그는 중인 출신으로 지식인들과 교류하며 문학과 시, 그림을 논한 문인정신을 겸비한 심미주의자였습니다.

오수(午睡)는 낮잠을 이르는 말입니다. 그러니 오수삼매(午睡三昧)는 낮잠에 깊이 빠졌다는 뜻입니다. 얼마나 깊이 잠들었으면 삼매(三昧)에 든 것처럼 보였을까요. 고단한 탁발승의 길거리 잠은 스스로의 맘에 비치는 절(寺)이자, 스스로의 몸에 들이는 공양(共養)입니다.

오수삼매(午睡三昧)라는 그림 속의 스님은 어디를 가던 길이었을까요. 스님이 짚신을 신은 채 앉은 자리에서 깜빡 잠이 들었습니다. 무릎에 두 손을 올려놓고 잠시 쉰다는 것이 스르르 눈이 풀린 모양입니다. 세상에서 가장 무거운 것이 졸릴 때의 눈꺼풀입니다. 밀려드는 졸음은 천하장사도 당해낼 수 없습니다.

스님이라고 예외가 아닙니다. 잠에 취한 스님을 표현하기 위해 어깨 부분을 먹으로 진하게 그렸습니다. 바위처럼 무거운 졸음이 짓누르는 것 같습니다. 눈썹까지 세밀하게 그린 얼굴과 먹의 농담변화를 결합한 승복이 묘한 대조를 이루면서 태산 같은 잠의 무게가 더욱 실감납니다. 자연스레 땅으로 흘러내리는 가사장삼은 스님의 고단함을 잠으로 아우르는 고요한 선묘(線描)의 아름다움이 있습니다.

스님의 주변에는 나무 한 그루 없고 바람 한 점 없는 듯합니다. 고요한 잠의 무아지경(無我之境) 모습입니다. 마치 길 위에 웅크리고 졸음에 빠진 스님은 방금 사람을 그치고 선경(仙境)에 빠져든 바위, 세상 생사의 이력이 갖은 주름과 곡선으로 갈마든 괴석(怪石) 같기도 합니다. 만행승(卍行僧)의 닳고 해진 짚신 밖으로 과도하게 밀려나온 발가락은 무소유의 경지로 보입니다. 손가락처럼 유난히 긴 발가락이 왠지 스님의 섬세한 눈매와 따스한 번뇌와 다감한 속내를 대변이라도 하는 듯합니다. 가사장삼은 누군가 잠자는 스님 위로 이불을 덮어준 것처럼 풍성하게 느껴집니다.

부처님도 자신을 '나는 세상에서 잠을 잘 자는 사람들 가운데 한 사람'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증일아함경(增一阿含經)에 부처님이 말씀하신 숙면의 비법이 이렇게 적혀 있습니다.
"감각적 욕망에 오염되지 않고, 청량하고 집착이 없고, 완전한 적멸을 성취한 거룩한님은 언제나 잘 자네. 모든 집착을 부수고, 마음의 고통을 극복하고, 마음의 적멸을 성취한 님은 고요히 잘 자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