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의 묵상

삶의 가치는 사랑하는 데 있음을 깨닫게 됩니다

박남량 narciso 2016. 8. 17. 11:48


삶의 가치는 사랑하는 데 있음을 깨닫게 됩니다




희말리아 깊은 동굴에서 명상에 잠겨 있던 어떤 구루(Gurus)가 눈을 떴는데 놀랍게도 어떤 방문객이 자기 앞에 앉아 있는 것이었습니다. 그는 유명한 수도원장이었습니다. 구루(Gurus)는 산스크리트어로 정신적 스승을 뜻합니다. 구루는 물었습니다.


"당신이 찾고자 하는 것이 무엇이오?"

그러자 원장은 어떤 슬픈 이야기를 들려주기 시작했습니다. 그의 수도원은 서방세계에서 한때 이름을 날리던 유명한 수도원이었습니다. 수도원의 방은 지원자들로 가득찼고 성당은 수도승들의 찬미 소리로 가득했습니다. 그런데 뜻하지 않는 일이 일어났습니다.

깨달음의 수양을 위해 오던 사람들은 더 이상 수도원을 찾아오지 않았고, 넘치던 지원자들의 발길은 끊겼으며 교회는 조용해져 버렸습니다. 수도원에는 겨우 몇 명의 수도승들만이 남게 되었고 그들은 수도원 규칙을 무거운 마음으로 지켜가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수도원장은 구루를 찾았던 것입니다.

"수도원이 이 지경이 된 까닭이 우리들의 죄 때문입니가?"

"그렇습니다. 무지의 죄 때문입니다."

"그러면 그 죄가 구체적으로 어떠한 죄입니까?"

구루는 이렇게 말하고는 잠시 눈을 감고 깊은 명상으로 되돌아 갔습니다.

"당신들 수도승 가운데 한 분이 메시아인데 변장하고 있소. 그런데 당신들은 그것을 모르고 있소."

힘들고 지친 여행길에서 수도원으로 돌아온 수도원장의 가슴은 메시아가 지상에 돌아 왔다는 그리고 그것도 자기 수도원에 계신다는 생각에 어쩔 줄 몰라했습니다. 대체 어떻게 된 일이었기에 자신을 그 메시아를 알아 보지 못했단 말인가. 그렇다면 그는 누구일까?

함께하는 수사들을 생각하였지만 그들은 아니었습니다. 너무 많은 결점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메시아가 변장해 있다고 구루는 말하지 않았던가. 그렇게 생각해 보니 수도원의 모든 수도승들은 결점이 없는 사람이 없었습니다. 그런데 그들 중 한 사람이 분명 메시아인 것입니다.

수도원장은 모든 수도승들은 블러 모아 놓고 여행에서 어떤 일이 있었는지를 설명해 주었습니다. 그들은 서로 믿지 못하겠다는 눈빛으로 바라 보았습니다. 메시아라고? 이곳에? 말도 안되는 소리! 그러나 그 메시아는 변장한 채 이곳에 있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럴 수도 있다. 그렇다면 누구란 말인가? 옆사람인가, 아니면.....

한 가지만은 분명했습니다. 만약 메시아께서 그들 가운데 변장한 모습으로 와 있다면 그를 알아 보기는 어렵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리하여 그들은 서로를 깊은 존경과 사려로 대하기 시작했습니다.

"혹시 이 분이 메시아일지도 몰라."

그들은 서로를 대할 때 스스로에게 그렇게 중얼거렸습니다. 이런 태도의 결과는 수도원 안에 생기와 기쁨을 가져다 주었습니다. 그러자 곧 많은 지원자들이 수도원 문을 두드렸고 성당은 다시 한번 사랑으로 가득찬 찬미의 노래소리로 울려 퍼지게 되었습니다.

안토니 드멜로(Anthony De Mello)의 '입큰 개구리의 하품'(삶과 함께/1992)에서 인용한 글입니다. 함께 어울리며 나누며 서로에게 기쁨을 주는 것이 삶의 잔치입니다. 구태의연하게 살아가는 우리에게 감히 새로운 삶을 살도록 마련되어 있다는 것을 아십니까. 새로운 삶을 산다는 것은 자기를 올바로 아는 데서부터 시작됩니다.

자기를 바로 볼 수 있는 사람은 세상 만물의 이치를 제대로 볼 수 있고 삶의 이유의 목적도 갖고 있습니다. 내 존재와 삶이 무엇을 위해 있는지 보게 됩니다. 곧 삶의 가치는 사랑하는 데 있음을 깨닫게 됩니다.<꽃사진: 수레국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