허균(許筠)의 장생전(蔣生傳)
장생(蔣生)은 어떠한 사람인지 알 수 없었다. 그는 기축년(己丑年 1589) 사이에 서울에 드나들며 비렁뱅이 노릇을 하였다. 누가 그의 이름을 물었다. 그러자 그는 격시 알지 못한다고 대답하였다.
蔣生不知何許人(장생불지하허인) 己丑年間(기축년간) 往來都下(왕래도하) 以乞食爲事(이걸식위사) 問其名則吾亦不知(문기명칙오역불지)
또한 그의 아버지와 할아버지가 살고 있는 곳을 물었다. 그러자 그는 다음과 같이 대답했다.
"우리 아버지가 밀양(密陽) 좌수(座首)로 계실 때에 어머니는 나를 낳은지 겨우 3년 만에 세상을 떠났습니다. 아버지는 비첩(婢妾)의 고자질에 혹하여 나를 전장(田庄)을 맡긴 종의 집으로 쫓아냈습니다. 그 뒤 나이 열다섯에 평민의 여자에게 장가들었는데, 몇 해 만에 아내는 죽고 말았습니다. 그래서 호서( 湖西)와 호남(湖南)의 수십 고을을 떠돌아다니다가 이제 막 서울로 온 것이지요."
問其祖父居住則曰(문기조부거주칙왈) 父爲密陽座首(부위밀양좌수) 生我三歲而母沒(생아삼세이모몰) 父惑婢妾之譖(부혹비첩지참) 黜我莊奴家(출아장노가) 十五奴爲娶民女(십오노위취민녀) 數歲婦死(수세부사) 因流至湖南西數十州(인류지호남서수십주) 今抵洛矣(금저락의)
장생의 얼굴은 매우 아름답고 빼어났으며 눈매는 그림 같고 이야기와 웃기를 잘 했으며 특히 노래를 잘 불렀다. 노래를 애처롭게 하여 남의 마음을 움직였다. 그는 늘 빨간 비단으로 지은 겹옷을 입되 아무리 춥고 더워도 바꿔입지 않았다.
其貌甚都秀(기모심도수) 眉目如畵(미목여화) 善談笑捷給(선담소첩급) 尤工謳(우공구) 發聲凄絶動人(발성처절동인) 常被紫錦裌衣(상피자금겹의)
어떤 술집이나 기생방 치고 그가 드나들며 익숙하게 놀지 않은 곳이 없었다. 또 술을 보면 곧장 가득히 부어 들고 노래를 불러 기쁨이 극도에 달한 뒤에야 자리를 일어섰다. 그는 술이 반쯤 취하면 눈먼 점쟁이, 술 취한 무당, 게으른 선비, 소박맞은 여인, 밥 비렁뱅이, 늑은 젖어미 등의 시늉을 하되 거의 실물에 가까웠다.
寒暑不易(한서불역) 凡倡店姬廊(범창점희랑) 靡不歷入慣交(미불력입관교) 遇酒輒自引滿(우주첩자인만) 發唱極其懽而去(발창극기환이거) 或於酒半(혹어주반) 效盲卜醉巫懶儒棄婦乞者老仍所爲(효맹복취무라유기부걸자로잉소위) 種種逼眞(종종핍진)
또한 가면으로 십팔 나한(十八羅漢)을 본받되 거의 흡사하였고 또 입을 움직이며 호각, 퉁소, 피리, 비파, 기러기, 고니, 두루미, 따오기, 까지, 학 등의 소리를 짓되 진짜인지 거짓인지 분간하기 어려웠다. 밤중에 닭 울음, 개 짖는 소리를 흉내내면 이웃집 개와 닭이 모두 따라서 울었다.
又以面孔學十八羅漢(우이면공학십팔라한) 無不酷似(무불혹사) 又蹙口作笳簫箏琶鴻鵠鶖鶩鴉鶴等音(우축구작가소쟁파홍곡추목아학등음) 難辨眞贗(난변진안) 夜作鷄鳴狗吠(야작계명구폐) 則隣犬鷄皆鳴吠焉(칙린견계개명폐언)
아침 나절이면 나가서 들이나 저자거리에서 동냥을 구하여 하루에 얻은 것이 거의 서너 말이 되면 두어 되만 밥을 지어먹고 나머지는 다른 비렁뱅이들게게 나누어 주었다. 그러므로 많은 비렁뱅이들이 그의 뒤를 따르곤 하였다. 그 이튿날도 역시 그렇게 하는데 남들은 그가 하는 일을 헤아릴 수 없었다.
朝則出乞於野市(조칙출걸어야시) 一日所獲幾三四斗(일일소획기삼사두) 炊食數升(취식수승) 則散他丐者(칙산타개자) 故出則群乞兒尾之(고출칙군걸아미지) 明日又如是(명일우여시) 人莫測其所爲(인막측기소위)
그는 일찍이 유명한 악공(樂工) 이한(李漢)의 집에 몸을 의지하였다. 계집종 하나가 호에게 호금(胡琴)을 배우느라고 아침 저녁으로 만나게 되어서 친숙해졌다. 하루는 계집종이 자주빛 봉미(鳳尾)를 잃어 버렸지만 그 잃은 장소를 몰랐다. 그녀는 "아침에 네거리로 오다가 길에서 준수한 청년을 만났는데 그가 웃으며 농을 건 뒤 몸을 스치더니 이내 봉미가 사라졌다.'고 되뇌이며 울기만 했다. 장생(蔣生)은 "에이, 어린 녀석이 감히 이런 짓을 해. 얘야 울지 마라. 저녁 나절이면 내 소매 속에 놓고 오마" 하고는 나는 듯이 어디론지 가버렸다.
嘗寓樂工李漢家(상우악공리한가) 有一叉鬟學胡琴(유일차환학호금) 朝夕與之熟(조석여지숙) 一日失綴珠紫花鳳尾(일일실철주자화봉미) 莫知所在(막지소재) 蓋朝自街上來(개조자가상래) 有俊年少調笑?倚(유준년소조소외의) 因而不見(인이불견) 啼哭不止(제곡불지) 生曰(생왈) 唉(애) 小兒何敢乃(애소아하감내이) 願娘無泣(원낭무읍) 夕當袖來(석당수래) 翩然而去(편연이거)
저녁이 되자 그는 계집종을 불러냈다. 서편 네거리 옆 경복궁 담을 돌아서서 신호문(神虎門) 모퉁이에 이르자 큰 띠로써 계집종의 허리를 맨 뒤 왼팔에다 걸고는 몸을 한번 솟구쳐 나는 듯이 몇 겹이나 되는 문에 뛰어들었다. 때마침 해는 저물어서 길을 분간할 수 없었다.
及夕(급석) 招叉鬟出(초차환출) 迤從西街傍景福西墻(이종서가방경복서장) 至神虎門角(지신호문각) 以大帶綰鬟之腰(이대대관환지요) 纏於左臂(전어좌비) 奮迅一踊(분신일용) 飛入數重門(비입수중문) 時曛黑莫辨逕路(시훈흑막변경로)
별안간 경희루 위에 닿았다. 청년 둘이 촛불을 잡고 나와 맞이하였다. 그들은 서로 쳐다보며 크게 한바탕 웃고 이내 들보 위 컴컴한 구멍 속에서 금, 구슬, 비단, 견직 따위를 수 없이 많이 끄집어냈다. 계집종이 잃어 버렸던 봉미도 그 속에 있었디. 그 청년은 이를 돌려주었다. 장생(蔣生)이 말했다. "두 아우님은 행동을 삼가서 세상 사람으로 하여금 우리의 자취를 알게 하지 마시오."
倏抵慶會樓(숙저경회루) 上有二年少秉燭相迓(상유이년소병촉상아) 相視大噱(상시대갹) 因自梁上鑑嵌中(인자량상감감중) 出金珠羅絹甚多(출금주라견심다) 鬟所失鳳尾亦在焉(환소실봉미역재언) 年少自還之(년소자환지) 生曰(생왈) 二弟愼行止(이제신행지) 毋使世人瞰吾蹤也(무사세인감오종야)
돌아올 때는 날아왔는데 북편의 성에 이르러 계집종을 그의 집으로 보냈다. 그 이튿날이었다. 날이 채 밝기 전에 계집종은 이한(李漢)의 집을 찾아 감사의 듯을 표하려 하였다. 장생(蔣生)은 오히려 취하여 자는데 코 고는 소리가 컸다. 그러나 사람들은 장생(蔣生)이 밤에 문을 나간 것을 전혀 알지 못하였다.
遂引還飛出北城(수인환비출북성) 送還其家(송환기가) 未明詣李家謝之(미명예리가사지) 則醉臥齁齁(칙취와후후) 人亦不知夜出也(인역불지야출야)
임진년(任辰年 1592) 사월 초하룻날이었다. 그는 술 몇 말을 마신 뒤에 크게 취하여서 네거리를 가로막은 채 춤을 추며 노래를 쉬지 않고 불렀다. 밤이 되자 수표다리 위에 거꾸러졌다. 다음날 사람들이 보니 그는 이미 죽은 지 오래였다. 그의 시신은 썩어서 벌레가 되어 낱낱이 날개가 돋혀 어디론지 날아가 버렸다. 그리하여 하룻밤 사이에 다 없어져 버렸고 다만 옷과 버선만 남아 있을 뿐이었다.
壬辰四月初吉(임진사월초길) 賖酒數斗大醉(사주수두대취) 攔街以舞(란가이무) 唱歌不綴(창가불철) 遲明(지명) 殆夜倒於水標橋上(태야도어수표교상) 遲明(지명) 人見之(인견지) 死已久矣(사이구의) 屍爛爲蟲悉生翼飛去(시란위충실생익비거) 一夕皆盡(일석개진) 唯衣襪在(유의말재)
무인(武人) 홍세희(洪世熹)는 연화방(蓮花坊)에 살고 있었다. 그는 장생(蔣生)과 가장 친밀한 사이었다. 그 해 사월에 장수(將帥) 이일(李鎰)을 따라 왜적을 막으러 갔었는데 조령(鳥嶺)에 이르러 장생(蔣生)을 만났다. 장생
(蔣生)은 짚신에다 막대를 끌고 있었다. 그의 손을 잡고 몹시 기뻐하자 장생(蔣生)이 말하였다. "나는 실은 죽은 게 아닐세. 저 동해 속에 한 섬나라를 발견하러 가는 길이라네."
武人洪世熹者居于蓮花(무인홍세희자거우련화방) 最與之昵(최여지닐) 四月從李鎰防倭(사월종리일방왜) 行至烏嶺(행지오령) 見生(견생) : 장생을 만났다. 見生芒屩曳杖(견생망교예장) 握手甚喜曰(악수심희왈) 吾實非死也(오실비사야) 向海東覓一國土去矣(향해동멱일국토거의)
그가 계속해서 말하였다.
"자네 올해에는 죽지 않을 텐데 전쟁이 일어나면 높은 숲으로 들어가지. 물가로는 가지 말게나. 그리고 정유년(丁酉年 1597)에는 결코 남쪽에는 오지 말 것이며 혹 공무가 생겨서 남으로 오더라도 산성엔 오르지 말게." 말을 끝내자 곧 나는 듯이 어디론지 사라져 버렸다. 그 후로는 그의 간 곳을 알 수 없었다.
因曰(인왈) 君今年不合死(군금년불합사) 有兵禍(유병화) 向高林勿入水(향고림물입수) 丁酉年(정유년) 愼毋南來(신무남래) 或有公幹(혹유공간) 勿登山城(물등산성) 言訖(언흘) 如飛而行(여비이행) 須臾失所在(수유실소재)
그 후 홍세희(洪世熹)는 탄금대(彈琴臺) 싸움에 장생(蔣生)의 말을 기억하고는 산 위로 내달려 올라가 죽기를 면하였다. 정유년(丁酉年) 7월에 그는 마침 금군(禁軍)으로 입직(入直)하였다가 임금의 명령을 받들어 이원익(李元翼) 상국(相國)에게 교지(敎旨)를 전달하러 영남으로 내려가게 되었다. 그는 장생(蔣生)이 일찍이 경계해주었던 말을 모두 잊어 버렸다. 마침 돌아오는 길에 성주(星州)에 이르러서 왜놈들이 쳐들어왔다. 그러자 그는 황석성(黃石城)의 경비가 튼튼하다는 말을 듣고는 급히 그 성으로 들어갔다. 그러나 성이 함락되었고 홍세희는 결국 목숨을 빼앗기고 말았다.
洪果於琴臺之戰(홍과어금대지전) 憶此言(억차언) 奔上山得免(분상산득면) 丁酉七月(정유칠월) 以禁軍在直(이금군재직) 致有旨於梧里相(치유지어오리상) 都忘其戒(도망기계) 回至星州(회지성주) 爲賊所迫(위적소박) 聞黃石城有備(문황석성유비) 疾馳入(질치입) 城陷倂命(성함병명)
내가 일찍이 젊었을 때 협사(俠邪,俠士)들과 친하게 사귄 적이 있었다. 장생(蔣生)과 더불어 농담을 나눌 정도로 가까운 탓에 그의 방술(方術)을 빠짐없이 다 구경할 수 있었다. 아아! 그것은 참으로 신기한 것이었다. 이를 두고 옛 사람들이 말하는 검선(劒仙)이라 할 수 있지 않겠는가!
余少曰狎游俠耶(여소왈압유협야) 與之諧謔甚親(여지해학심친) 悉覩其技(실도기기) 噫其神矣(희기신의) 卽古所謂劍仙者流耶(즉고소위검선자류야)
허균(許筠 1569-1618)의 장생전(蔣生傳)은 한문소설 다섯 편 가운데 하나이다. 고전소설, 전기소설(傳奇小說)로 전기적(傳奇的) 성격을 띄고 있다. 설명적, 한문체로 되어 있는 문어체이다. 이 한문소설의 특징은 장생(蔣生)을 힘들게 살아온 이인(異人)의 면모를 지니고 있는 인물로 묘사하였으며, 갑자기 죽었다가 자기와 가까운 이에게 나타나 조언을 해주고 다시 사라져 버린 것으로 이야기의 결말이 맺어져 있다. 이는 고전 소설의 일반적인 행복한 결말의 구조를 벗어나 미완의 결말 구조를 택한 것이다. 장생전(蔣生傳)은 홍길동전과 관련성이 깊다. 허균(許筠)의 시문집(詩文集)인 성소부부고(惺所覆瓿藁)에 실려 있다.
호금(胡琴) : 비파
봉미(鳳尾) : 머리에 꽂는 노리개
금군(禁軍) : 궁궐을 지키며 임금을 호위하는 병사
오리(梧里) : 당시 우의정 이원익의 호
<사진: 강릉 교산시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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