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사 성어

지혜를 자랑함이 없이 속세의 티끝에 동화하라는 고사성어 화광동진(和光同塵)

박남량 narciso 2016. 1. 18. 12:44


지혜를 자랑함이 없이 속세의 티끝에 동화하라는 고사성어 화광동진(和光同塵)



노자(老子)에 있어서 자신의 그 똑똑한 광채를 줄이고 세속의 눈높이에 맞추는 것도 아름다운 사람의 자세라고 말하고 있다. 『참으로 아는 사람은 그 앎을 말하지 않으며 앎을 말하는 사람은 아는 사람이 아니다. 진정한 앎이 있는 사람은 그 이목구비를 틀어막고 지혜의 문을 닫으며 지혜의 날카로움을 꺾으며, 지혜로 인해 일어나는 혼란을 풀고 지혜의 빛을 감추어 나타내지 않고 속세의 티끌과 하나가  된다. 이것을 현동(玄同)이라고 한다. 그러므로 이와 같이 현동(玄同)의 사람에 대해서는 친해질 수도 없고 멀리 할 수도 없으며 이득을 줄 수도 없고 해(害)를 줄 수도 없으며, 귀(貴)하게 할 수도 천(賤)하게 할 수도 없다. 그렇기 때문에 천하에서 가장 귀(貴)한 것이 된다.』라고 도(道)의 일단(一端)을 설명하고 있다.

인간의 현실 사회 속에서도 이러한 도(道)의 법칙에 순응(順應)하는 것만이 최상(最上)으로 여겼다. 따라서 현실적(現實的)인 인간사회에서 화광동진(和光同塵)이란 뜻은 위대한 일, 좋은 일, 남에게 이익을 가져다주는 일 등등일지라도 그것을 내세워서 자기의 공으로 여기며 자기의 힘에 의하여 이루어진 것이라고 하여 자기 스스로가 주제자가 되고자하는 것 따위는 부도덕(不道德)한 것으로 여겼다. 훌륭한 지도자가 되기 위해서는 우뚝 서서 잘났다고 하는 것보다는 자신의 빛을 누그러뜨리고 세상 사람들의 눈높이로 내려가 민중과 함께 하는 자세가 필요하다는 것이다.

불교(佛敎)가 중국(中國)에 전파됨에 따라 중국의 고승(高僧)들은 이 화광동진(和光同塵)이라는 어휘를 빌어서 중생을 제도하는 말로 삼았다. 빛나는 불교(佛敎)의 진리를 가슴속에 가득 안고서도 그것을 나타내지 않으며 행동(行動)으로 대중(大衆)속에 파묻혀 중생(衆生)을 교화(敎化)하고 제도(濟度)하는 그 소박하고 아름다운 모습을 당시의 승려(僧侶)들은 이상(理想)으로 삼았던 것이다.


노자(老子)의 도덕경(道德經)에 등장하는 아름다운 자세에서 유래되는 고사성어가 화광동진(和光同塵)이다.

화광동진(和光同塵)이란 자기의 지혜를 자랑하는 일 없이 오히려 그 지혜를 부드럽게 하여 속세의 티끝에 동화함을 일컫는 말이다. 자기가 가지고 있는 지혜 같은 것을 자랑하는 일이 없이 오히려 그것을 흐리고 보이지 않게 하여 속세 사람들 속에 묻혀 버리는 것을 말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