꽃과 문화

조선 여인의 꽃놀이와 꽃꽂이 문화

박남량 narciso 2017. 2. 14. 16:51


조선 여인의 꽃놀이와 꽃꽂이 문화



조선초 궁궐에서는 3년마다 꽃잔치를 여는 게 관례였습니다. 봄엔 교서관 벼슬아치들이 살구꽃 아래서 홍도음(紅桃飮)을, 초여름엔 예문관 관원들이 모여 장미음(薔薇飮)을, 한여름엔 성균관 관원들이 소나무 아래 모여 벽송음(碧松飮)을 열었습니다. 피서음(避暑飮), 벽통음(碧筩飮), 상통음(象筩飮), 하삭음(河朔飮)등의 이름으로 초봄의 매화, 여름의 연꽃, 가을의 국화 등을 눈으로 보고 입으로 맛보며 노닐었습니다.


그러나 옛 전통사회의 예법(禮法)이 설사 부모의 대소상(大小祥)이라 할지라도 여인들은 신분이 귀할수록 외출을 못하는 풍토였습니다. 예교(禮敎)의 "晝不遊庭  無故不出門(주불유정 무고불출문) 낮에는 뜰에서 노닐지 않으며 문을 넘지 않는다."는 엄격한 계율로 부녀자의 야유(野遊)는 생각도 못할 금기였습니다.

세종실록(世宗實錄)에 춘삼월 진달래 필 때, 화전놀이인 야유(野遊)의 기록이 있습니다. 세종 3년 4월 두견화 필 때 귀가부인(貴家夫人)이 장(帳)을 설치하고 호화와 사치를 경쟁하였다고 하며 이름하여 전화음(煎花飮)이라고 합니다. 이렇게 꽃필 때 꽃놀이, 단풍 들 때 단풍놀이는 궁중에서도 있었는데 비빈들이 공경부인(公卿夫人)을 초대하여 후원에서 열었다고 합니다.

여인들은 장신구로 보통 꽃과 보석으로 장식된 비녀를 꽂았습니다. 여인들이 가장 즐겼던 장신구는 바로 꽃입니다. 나들이를 가거나 정원을 거닐 때 꽃을 꺾어 머리에 꽂기도 했습니다. 문정왕후(文定王后 1501-1565)의 궁중 화연(花宴) 때 이야기가 있습니다. 문정왕후(文定王后)가 성렬대비(聖烈大妃)일 때 여러 공신(功臣) 부인들과 후원에서 꽃놀이를 가졌습니다. 성렬대비(聖烈大妃)가 먼저 머리에 꽃을 꽂으며 여러 부인들에게 권하였습니다. 이때 임숭선(林嵩善)의 아내가 미망인이기에 고개를 숙이고 불응하는 태도를 보이자 성렬대비(聖烈大妃)는 이렇게 권합니다.

"여러 공신들은 그 의리로 말할진대 일가나 다름이 없도다. 그래서 여러분들과 같이 행동하는 뜻을 보이기 위해 나 역시 미망지인(未亡之人)이지만 솔선해서 꽃을 머리에 꽂는 것이오."

궁중 유연(遊宴)에서 왕(王)이 머리에 꽃을 꽂은 이야기도 있다. 비록 생화(生花)가 아닌 조화(造花)이지만 왕을 비롯하여 남녀 없이 머리에 꽃을 꽂은 사실이 전해지고 있습니다. 정조대왕(正祖大王 1752-1800)이 생부(生父)인 사도세자(思悼世子)로 불리는 장헌세자(莊獻世子 1735-1762)와 생모(生母) 혜경궁(惠慶宮) 홍씨(洪氏)의 회갑(回甲)을 맞이하여 현륭원(顯隆園)이 있는 화성(華城 지금의 수원)으로 혜경궁(惠慶宮)을 모시고 잔치를 할 때의 일입니다. 화성일기(華城日記)에 다음과 같은 대목이 보입니다.

"주상이 금화(金花)를 꽂으시고 한 가지 꽃을 나눠 주오시는지라 각각 절하고 받자와 갓 위에 꽂을 새..."

머리에 꽃을 꽂는 문화는 삼국시대부터 계승되어 왔습니다. 고려시대에는 꽃을 담당하는 관원으로 권화사(勸花使)가 있었으며, 조선시대에는 예빈사(禮賓司)에서 담당하였습니다. 진연, 혼인, 절기 등 특정일에 꽃을 머리에 꽂아 장식하였습니다. 꽃은 금속, 비단, 모시, 종이 등의 재료를 사용하여 만드는데 비단 등 천으로 만든 꽃을 사권화(絲圈花), 종이로 만든 꽃을 지권화(紙勸花)라고 합니다.

즐거운 잔치에 있어서 머리에 꽃을 꽂는 풍속은 근엄했던 유교국가의 정신풍토를 생각하면 파격적이며 로맨틱한 풍속이 아닐 수 없습니다. 각박한 자연조건으로 말미암아 섬세하고 정서적인 면이 희박한 것 같은 우리 민족성으로 보아서는 아름다운 풍속임에는 틀림이 없습니다.<꽃사진: 겹벚꽃>