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사 성어

임금의 신표를 지님으로써 충성을 한다는 고사성어 지절보은(持節報恩)

박남량 narciso 2017. 3. 22. 13:30


임금의 신표를 지님으로써 충성을 한다는 고사성어 지절보은(持節報恩)



흉노의 차제후(且醍侯) 선우(單于)의 요청으로 무제(武帝)는 화친을 맺고자 소무(蘇武)를 사신으로 보냈다. 이때 소무(蘇武)는 임금의 뜻에 따라 응분의 선물을 가지고 갔는데 교만해진 선우(單于)는 소무(蘇武)를 감금하고 한(漢)나라를 떠나 흉노를 위해 일하도록 회유했다.

소무(蘇武)는 신하의 절개를 굽히고 사명을 욕되게 하면서 목숨을 부지한들 무슨 명목으로 한나라에 돌아갈 수 있겠는가 하면서 지절(持節)할 것을 고집했다. 그리고 스스로 장도를 가지고 자결하려 하였지만 뜻을 이루지 못했다.

흉노에는 위율(衛律)이란 사람이 있었는데 그는 지난 날 한(漢)나라를 섬기다 흉노에게 투항한 장수로 선우(單于)의 명령으로 소무(蘇武)에게 이렇게 말하며 설득하고자 했다.

"나는 선우(單于)의 큰 은혜를 입고, 수만 명의 병졸까지 받아 부귀를 누리고 있습니다. 그대도 이렇듯 초야에 몸을 묻어 이름을 헛되게 하지 마십시오."

"너는 남의 신하된 사람으로 은의(恩義)를 저 버리고 임금과 부모를 배반했다. 만나기도 싫으니 그리 알라."

소무(蘇武)가 위율(衛律)의 이야기에도 욕을 퍼부으며 지절(持節)로서 굽히지 않자 흉노의 선우(單于)는 그를 북해 먼 곳으로 귀양을 보냈다. 어느 날 이릉(李陵)이란 자가 찾아왔다. 이릉(李陵)은 한(漢)나라 장수였는데 소무(蘇武)가 흉노의 볼모가 된 이듬해 흉노와 싸우다 패해 포로가 되었던 것이다.

이릉(李陵)은 한(漢)나라에 있을 때 소무(蘇武)와 둘도 없는 친구였다. 그래서 선우(單于)는 이릉(李陵)을 시켜 소무(蘇武)를 설득하려 한 것이다. 본래 이릉(李陵)도 충절을 지켜 흉노에게 굽히지 않았으나 친구인 소무(蘇武)를 위하여 설득에 나선 것이다.

"선우(單于)는 자네가 내 친구라는 것을 알고 꼭 데려오라며 나를 보냈네. 그러니 자네도 이제 고생 그만하고 나와 함께 가도록 하세. 人生如朝露(인생여조로)  인생은 아침 이슬과 같다고 하지 않는가."

이릉(李陵)은 끝내 소무(蘇武)의 절조를 꺾지 못하고 혼자 돌아갔다. 소무(蘇武)는 무제(武帝)의 신표(節)를 몸에 지니고 그것을 마음의 채찍으로 삼아 양을 기르면서 타향살이를 하고 있었다. 그러다 소무(蘇武)가 볼모가 된 지 19년 만에 무제(武帝)의 아들인 소제(昭帝)가 파견한 특사의 기지로 풀려나 고국 땅을 밟았다. 사신으로 갈 때는 청년이었으나 백발이 되어 돌아왔다. 


한서(漢書) 소무전(蘇武傳)에서 유래되는 고사성어가 지절보은(持節報恩)이다.

지절보은(持節報恩)이란 절(節)이란 옛날에 임금이 외국으로 보내는 사신에게 주던 신표로서 그것을 늘 몸에 지님으로써 충성을 다한다는 말이다. 사신들은 신표(節)를 지니고 그것을 마음의 채찍으로 삼았다고 한다.
<꽃사진: 동백나무 열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