을사사화 와 문정왕후
명종이 12세의 나이로
왕위에 오르니
문정왕후가
수렴청정을 하게
되는데
문정왕후의 친정 동기인 윤원형
일파
소윤(小尹)이
윤임 일파
대윤(大尹)을
몰아내어
사림이 크게 화를 입은
사건을
을사사화라고 말한다.
중종이 승하하니 뒤를 이어
30 세의 세자가 왕위에
올랐다.
이조 12대 왕
인종이었다.
인종이 중종의 장례를 치르고 난
후
몸져 누워 지내다 환후가
악화되어
즉위한 지 8개월 만에 승하하게
된다.
이어서
명종의 나이 12세에 왕위에
오르니
인종의 계모이며 명종의
어머니인
문정왕후가 대왕대비로서
수렴청정을
하게 되니 정국은 중종의 첫째
계비인
윤여필의 딸
장경왕후와
둘째 계비인 윤지임의 딸
문정황후의
외척간의 권력투쟁으로 양상이
바뀌었다.
두
왕후의 외척간의
권력투쟁은
중종의
비 신씨가 즉위 직후
페위되어
제1계비
장경왕후가 세자 호( 뒤에 인종
)를
낳은
뒤 죽고 윤지임의 딸이
제2계비 문정왕후로 책봉되어
경원대군( 뒤에 명종 )을
낳았는데
이 두 계비는 같은 파평 윤씨였다.
문정왕후의 형제인 윤원로, 윤원형이
경원대군으로 왕위를 계승하고자 하여
세자의 외숙인 윤임 ( 장경왕후의 아우 )과
경원대군의 외숙인 윤원형 사이에서 대립과
알력으로 조정은 윤임을 지지하는 대윤과
윤원형을 지지하는 소윤으로 갈라졌다.
그 뒤 중종이 죽자 세자가
인종으로 왕위에 오르니 윤임을 중심으로
대윤파가 득세하게 되었다.
인종은 사림의 명사를 신임함으로 인해
사림은 기묘사화 이후 다시 정권에
참여하게 되었는데 등용하지 못한
사람들은 윤원형 밑에 모여 윤임 일파에
대한 반격의 기회를 엿보고 있었다.
인종이 죽고 이복동생인 경원대군이
명종에 즉위하고 문정왕후의
수렴청정으로
정국의 형세는 역전되어 조정의
실권은
대윤으로부터 소윤으로
넘어갔다.
명종이 즉위하자 윤원형은
예조참의로
재등용되었다. 계급은 낮았지만 그는
소윤의 거두로서 위세가
당당하였다.
윤원형의
일파는 윤임 일파를
없애려고
윤원형의 첩 정난정을 궁중에
출입시켜
문정왕후와 긴밀한 연락을 취하고
있었다.
이렇게 하여 윤임 일파를 칠
준비는
착착 진행되고 있었다.
대윤 일파와 개인적인 감정이 있던
병조판서 이기가 어전에 나와서
우찬성 윤임이 계림군 유를
대행왕의 양자로 삼아 그를 옹립코자
모의하였다고 하고
윤임은 중종 때부터 다른 마음을 품고
그것을 추진하고 있다고 하면서
좌의정 유관과 이조판서 유인숙 등과도
공모한 사실이 있다고 아뢰니
중추부지사 정순붕이 뒤이어
윤임이 왕대비의 처소에 들어
내관들을 모두 물리치고 생질부의
손을 잡고 은밀한 말을 주고 받았다고
아뢰니 이들의 싸움은 끝나고 있었다.
문정왕후는 왕을 앞세우고 충선당에
나와 소윤 일파로 하여금 대윤파들의
죄상을 상주케 하고 바로 처분을 내렸다.
윤임, 유관, 유인숙은 사사되고
계림군 유는 고문으로 대역의 사실을
실토케 하여 효수되었으며
봉성군 완은 평창으로 귀양갔다가
두해 후에 사사되고
윤임의 아들 삼형제가 모두 사약을
받아 죽는 등 모두 참형을 당했다.
여기에 희생된 사람은 10 여명이
넘었으며 을사사화가 끝난 뒤에도
이 여파는 계속되어 그 후 5-6 년에 걸쳐
윤임 등을 찬양하였다는 등의 갖가지
죄명으로 유배되는 등 죽은 자의 수가
100 여명에 달하였다.
연산군 이래 약 50 년간 관료 간의
대립이 표면화되어 나타난 옥사는
을사사화로 마지막이었으나
이 사건은 모후 및 외척이 정권을 전횡하는
외척정치의 길을 열어 놓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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