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오사화(戊午士禍) 와 김일손
무오사화는 발단이 김일손의
사초에
있다 하여 사화라고
부른다.
이조 창업 이후 연산조에
이르기까지
백년 동안 평화가 계속되어
왔다.
이때에
이르러
고려말기
대학자들의 제자들이
벼슬에 올라 신진세력을
형성하는데
그 중심인물이
김종직이었다.
김종직은 임금의 신임이
두터워
그의 제자 김일손, 김굉필 등
당당한 학자들을
등용하여
삼사에서 세력을 형성하게
되니
삼사에서는 영남
선비들의
독무대처럼 되어
갔다.
세월이 흐름에 따라 영남
학자들은
기성 세력과의 대립이
노골화되었다.
유자광의 현판
이야기이다.
일찌기 유자광은
서얼출신이었으나
무예가 출중하여 공신이
되어
무령군으로 봉작을 받은
사람이다.
그가 함양 명승지를
돌아다니며
한 수의 시를 지어
군수에게
현판을 만들어 달게
하였는데
공교롭게도 다음 해
김종직이
함양군수로 부임해
왔다.
김종직이 유자광의 현판을
보고는
유자광 같은 인물이 쓴 현판을 걸 수가
없다고 하면서 즉시 떼어 불살라
버렸다.
유자광의
현판은 일년 만에
사라졌다.
이극돈이 전라감사로 있을
때
국상이 났는데도 향을 올리지
않고
기생과 놀았다는 사실을
당시 사관으로 있던
김일손이
사초(史草)에 일일이
기록하였다.
이러한 일로 유자광과
이극돈은
김종직 일파를 증오하는 마음이
일치하여
보복을 결심하게
되었다.
연산왕 4년 성종실록의 편찬이
시작되었다.
실록청의 당상관이 된
이극돈이
김일손이 기초하여 사초에
삽입된
김종직의 조의제문이 세조가
단종으로부터
왕위를 빼앗은 사건을 비방한 것이라
하여
이것을 문제삼아 유자광과
더불어
학자들을 싫어하는 연산왕에게
고했다.
영남학자들의 잔소리가 싫었던
연산왕은
즉시 유자광을 시켜 문초토록
하였다.
사건을 확대하여 김일손
일파의
가택 수색이 단행되었고 그
관련자들을
잡아들였는데 관련된
사람은
김종직의 제자들로서 권오복,
권경유,
이목, 김굉필, 정여창 등 30
여명이
피살되거나
쫓겨났다.
그리고 이 일파의 죄악은
김종직이 선동한 것이라
하여
이미 죽은 김종직을
부관참시하였다.
이 사화를 계기로 유자광의
위세는
당당하였으나 사림들의 사기는 떨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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