싸움터에서 목숨을 잃은 비운의 주인공 고국원왕
미천왕이 세상을 떠나자
그의 아들 사유가 왕위를 이어받았다.
그가 바로 국강상왕이라고도 하며
고국원에 묻혀 고국원왕이라 한다.
왕좌에 오른 고국원왕은
이듬해 2월에 졸본으로 가서
시조의 사당에 제사를 지내고
백성들 중 노인, 병자들을 두루
위문하고 졸본으로부터 돌아왔다.
당시 중국은 나라가 갈라져서
통일을 이루지 못하고 있었는데
그런 어지러운 가운데 모용외가
세력을 쌓아가고 있었다.
모용외가 세운 나라가 연나라이다.
고구려 고국원왕이 342년 2월에
환도성을 수리하고 국내성을 쌓고
8 월 수도를 환도성으로 옮겼다.
연나라 모용황이 대군을 일으켜
모용한과 모용패를 선봉으로 삼고
고구려를 침범하여 왔다.
그런데 요동에서 환도성으로 오자면
남쪽 길과 북쪽 길 두 갈래가 있었다.
남쪽 길은 좁고 험하고
북쪽 길은 평탄하여 수월한 길이였다.
갈림길에서 모용황이 장수들에게
어느 길을 택하면 좋겠냐고 물으니
여느 장수들은 두말않고 평탄한
북쪽 길을 택하였으나 모용한이
고구려는 북쪽 길을 철저히 방비하고
있을 것이니 북쪽 길은 형식적으로
공격하고 대군을 남쪽으로 몰아야
중심부를 칠 수 있다고 말하니
모용황이 그렇게 하기로 하였다.
고국원왕은 아우인 무에게
정예 병사 5만을 이끌고 북쪽을 막게 하고
왕 자신은 약한 군사를 거느리고
남쪽 길을 방어 하였다.
작전면에서 이렇게 뒤지니 전쟁에서
고구려가 패하는 것은 뻔한 일이다.
모용황은 힘 안 들이고 남쪽 험산을 넘어
고구려 도읍 환도성을 포위하였다.
다급해진 고국원왕은
어머니 주씨와 왕비를 남겨 놓고
혼자 단웅계곡으로 들어가 몸을 숨겼다.
환도성을 함락시킨 모용황은
고국원왕 어머니 주씨와 왕비를 포로로
연나라로 보냈다.
북쪽 길을 지키던 아우 무도
어떻게 손을 써볼 수가 없었다.
아우 무는 남쪽으로 달아났다.
연나라 모용황은 더 이상 추격을 않고
고구려 땅을 물러가면서
미천왕의 무덤을 헐어 그 시체를 꺼내어 싣고
수많은 보물을 탈취하고 궁을 불태우고
환도성을 다시 쓰지 못할 정도로 파괴하고
남녀 5만여 명의 포로를 데리고 돌아갔다.
이리하여 연나라는 제발로 물러갔으나
고구려가 입은 피해는 어마어마했다.
고국원왕은 지금의 강계인 동황성을
임시 도읍으로 정하고 이듬해에
아우를 연나라로 보내 진귀한 예물을
바치며 미천왕의 시체와 어머니 주씨를
돌려 달라고 애원했다.
모용황은 고구려가 신하의 예를 갖추자
미천왕의 시체는 돌려 주었지만
어머니는 계속 볼모로 두었다.
그후 왕자 구부를 볼모로 보내고
어머니 주씨가 고구려로 돌아오는데
13 년간의 인질 생활을 하였다.
고구려 역사상 보기드문 수치이다.
옛말에 좋지 않은 일은
혼자 오지 않고 짝으로 온다더니
북쪽에 이어 이번에는 남쪽에서
백제의 근초고왕이 고구려를 넘보게 되었다.
백제의 근초고왕이 삼만의 군사를 이끌고
고구려 영토에 발을 들여놓자
고국원왕이 몸소 군사를 데리고 나가
평양에서 전투를 벌였다가 화살을 맞아
세상을 떠났다. 고국원에 장사하고
시호를 고국원왕이라 하였다.
아들 구부가 소수림왕이 되었다.
고구려 역사상
싸움터에서 목숨을 잃은 임금은
고국원왕 하나뿐일 것이다.
'역사 산책' 카테고리의 다른 글
낙화암 (0) | 2007.01.30 |
---|---|
김정호와 대동 여지도 (0) | 2006.12.27 |
머슴살이를 한 미천왕 (0) | 2006.11.08 |
시기와 질투로 제 꾀에 죽은 관나 부인 (0) | 2006.11.02 |
동천왕 과 시원 그리고 신하 밀우, 득래, 유유 (0) | 2006.10.27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