낙 화 암
고스란히 남아 있는 곳이다.
백제의 마지막 흔적이 남아있는 부여에는
부소산이 여느 동네의 뒷산처럼
나지막히 자리잡고 있다.
이 부소산이 백제의 흥망성쇄를
고스란히 간직하고 있는 역사의 현장이다.
부소산성과 고란사, 낙화암,
그리고 그 아래를 흐르는 백마강이
백제인의 숨결을 아직도 안고 있다.
낙화암은 어디를 가고 누구를 만나든
백제를 얘기할 때의 화두가 된다.
의자왕이 궁녀와 더불어
화음탐락하여 정치가 해이해지자
성충이 극진히 간하였으나
왕은 듣지 않고 성충을 옥에 가두었다.
성충이 말라 죽게 되자 상소를 올리는데
「 충신은 죽음에 임하여도
임금을 잊지 못하는 법인즉
마지막으로 한 말씀 아뢰고 죽겠습니다.
반드시 국난이 닥쳐 올 것입니다.
만약 타국의 군사가 공격해 오면
육로로는 침현, 일설에는 탄현을
넘지 못하게 하고 수군은 지벌포의
언덕을 들어서지 못하게 하여 그 요새를
의거하여 방어해야 할 것입니다」
왕은 끝내 이 말을 듣지 않았다.
당나라 소정방이 13 만의 대군을 이끌고
바다를 건너 백제의 도성 서쪽 덕물도에
도착하니 신라 김유신이 정병 5 만을
거느리고 당군과 합세하였다.
사태가 이에 이르자 의자왕은 신하들을
모아 놓고 대비책을 논의하였다.
한편 신라의 김유신은 아무런 저항없이
탄현을 지나 황산벌로 진출하여
계백장군과의 전투에서 승리하였다.
이제는 최후의 순간이 다가 온 것이다.
의자왕은 친히 군대를 지휘하며
최후의 일인까지 죽음을 각오하고 싸우니
피비린내 나는 결전이었다.
왕은 최후가 다가왔음을 알고
충신 성충의 말을
듣지 않은 것이 한이로구나
하는 한탄소리와 함께 눈물을 흘렸다.
어느덧 대궐 정문에는 당나라 기가 꽃히고
왕은 황망히 궁궐 뒷산 부소산을 올라갔다.
밤은 이미 깊어
달이 서쪽으로 기울기 시작했다.
왕이 피신을 하니 궁녀들도 뒤를 따랐으나
길은 험하고 일시에 많은 사람들이 뒤엉켜
갈팡질팡 방향을 찾지 못하고 있을 때
뒤에서는 적병이 마구 몰려오고 있었다.
적병에게 붙잡히면
욕을 당해 몸을 더럽히게 된다.
붙잡히지 않으려고 죽을 힘을 다하여
앞으로 달려갔으나
푸른 강물이 앞을 가로 막는다.
적군에게 몸을 더럽히고 구차하게 살 바에야
차라리 죽는 편이 낫다고 생각한 궁녀들은
앞을 다투어 강물로 뛰어 들었다.
아까운 꽃송이는 피어 보지도 못하고
떨어지고 말았다.
낙화암과 삼천 궁녀의 이야기는
어디까지가 진실일까?
역사가 잘못 전해진 것은 아닐까?
낙화암에서 삼천 명의 여자가 통곡하며
줄을 서서 뛰어내릴만 한 공간이 있을까?
의자왕과 낙화암에 관한 역사는 진실일까?
일제시대 식민지 사학자들이
백제를 비하하기 위해 꾸며낸 것이 아닐런지?
낙화암은 사비성이 무너졌을 때
군사들과 지조와 절개를 지키려는
백제 아낙들이 몸을 던져 죽은 곳이다.
의자왕의 삼천궁녀가 몸을 던졌다는
이야기는 이제 우리의 기억속에서 지우고
도성안에서 끝까지 저항하였던
백제여인들의 충절과
아름다움과 절개를 읽었으면 한다.
망국의 한을 품고 죽어간
백제여인들의 넋을 생각하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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