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정호와 대동 여지도
나라의 힘으로도 만들기 어려운 지도를
혼자 힘으로 평생을 두고 만들어 낸
굳은 의지의 위인 김정호.
조선 후기 실학자이자 지리학자로서
황해도 출신으로서 본관은 청도이다.
조선시대 지도라면
동국지도, 청구도, 대동 여지도 등으로
동국지도는 세조 때 만들어진
우리나라 최초의 지도이며
청구도는 김정호의 대동 여지도 전에
만들어 진 지도이다.
김정호의 대동 여지도는
우리 조상이 만든 지도 중에서
가장 정확하고 과학적인 지도로서
대동이란 조선을 일컫는 말이며
여지도는 본래 세계 지도란 뜻이지만
여기에서는 조선 지도라는 뜻이다.
김정호가 없었더라면
한국의 지리학계는 서양의 지리학자들에게
참으로 면목이 없었을 것이다.
김정호는 어릴 때 같은 서당에 다니는
글벗 김용희로부터 어느 읍의 지도를 얻었다.
그는 지도를 가지고 그 읍으로 가서
실제 지형과 비교를 해보고는 실망을 하고
자신이 정확한 지도를 만들 결심을 했다.
글공부와 지리공부를 해온 김정호는
청년이 되자 개나리봇짐 하나만을
달랑 걸머지고 전국을 여행하기 시작했다.
그야말로 그런 힘겨운 여행이었다.
그때 그는 이미 지도 제작에 필요한
측량기술 등을 다 익힌 터였다.
그가 전국 팔도강산을 누벼 죽을 고생을
한 끝에 마침내 청구선표도를 완성했다.
청구란 조선이란 뜻이고
선표는 가로와 세로에 줄을 쳐서
리를 정확히 계산했다는 뜻이다.
어느 날 김정호가 더욱 정확하고
훌륭한 지도를 만들기 위해
막 대문을 나서려는데 딸이 쫓아와
목놓아 울면서 어머니가 위독하니
가지 말라고 옷자락을 잡아당겼다.
오랜 지병으로 그의 아내는
세상을 떠나고 말았다.
김정호는 자신을 탓하며
부인의 주검 앞에서 통곡했다.
그가 오늘까지 집안 걱정을 안 하고
지도 제작에 전념할 수 있었던 것은
모두 어진 부인 덕이었다.
당장 끼니를 이을 쌀 한 톨 없어도
아무 불평 없이 묵묵히 뒷바라지를
해 주던 그런 아내였기 때문이다.
전국 팔도강산을 누비기를 30년
그동안 그는 전국을 세 번이나 돌았으며
백두산에도 여러 차례 오르내렸다.
집으로 돌아온 김정호는 조사해 온 자료를
바탕으로 지도작성에 들어갔다.
우선 밑그림인 도본을 그려야 했다.
그 작업만도 수년 다음 작업은
인쇄를 위해 목판을 파야 했다.
시집 갔다가 돌아온 딸 순녀가
조수로서 그를 도왔다.
오랜 고생 끝에 김정호는 1861년
마침내 종이에 대동 여지도를 찍어 냈다.
발로 지도를 만들기 시작한 지
30년만에 맛보는 성취의 보람이었다.
이 대동 여지도에는
압록강, 두만강에서 남쪽의 작은 섬에
이르기까지 각 지방의 자연 환경이
자세히 기록되어 있어
정치, 경제, 국방에 두루두루 유익했다.
이렇듯 그는 오직 지도 제작과
지리 연구를 위해 몸바쳐
훌륭한 업적을 남겼던 것이다.
김정호는 나라가 외적의 침입을 받았을 때
적을 물리치거나 도적이나
난폭한 무리들을 토벌하는 데 도움이 되며
모든 백성들이 지리를 익히는 데도
자신의 지도를 이용하게 될 것이라고 믿었다.
대동여지도를 완성하여
김정호는 대동 여지도를 대원군에게 바쳤다.
그러나 대원군은 국가의 기밀을 누설했다는
어처구니없는 죄명으로 잡혀
모진 고문을 당하고 공을 인정받기는 커녕
지도의 필요성을 모르는 무지의 횡포로
옥에서 원통한 일생을 마쳤다.
그가 남긴 정신과 업적은
우리 역사 속에 살아서 빛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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