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천왕 과 시원 그리고 신하 밀우, 득래, 유유
산상왕이 죽자 그의 아들 교체가 뒤를 이으니
그가 고구려 제11대 임금 동천왕이다.
동양왕이라고도 하며 성품이 너그럽고
인자하여 한번도 화를 낸 적이 없었다.
어느 날 왕비가 동천왕의 마음이
얼마나 너그러운가를 시험해 보기로 했다.
왕이 아끼는 말의 갈기를 잘라 버렸다.
왕은 말에 오르려다 말고
말에 갈기가 없음을 보고
누가 이런 몹쓸 짓을 했는고 갈기가 없으니
말이 가엾고 쓸쓸하게 보이는 구나 할 뿐
더 이상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또 한 번은 이런 일도 있었다.
한 궁녀가 동천왕에게 수라상을 올리면서
그만 실수를 하여 왕의 옷에 국을 엎질렀다.
이것도 왕비가 시켰던 일이다.
그때도 왕은 궁녀를 꾸짖지 않고
국이 몹시 뜨겁구나 하면서 아무 말도 없이
다른 옷으로 갈아입었을 뿐이다.
임금이 이토록 마음이 넓고 관대하여
백성들이 믿고 따라서 나라 안팍이
어느 때보다 태평을 누렸다.
동천왕 20 년 때의 일이다.
위나라의 관구검이 고구려를 공격해 왔다.
동천왕도 비류수에서 위나라 군대와 맞섰다.
첫 전투에서 고구려군은 큰 승리를 거두었다.
여세를 몰아 양맥 계곡까지 추격해서
또 한 차례 승리를 거두었다.
동천왕은 거듭 승리를 거두자
위나라가 큰 나라라고 자랑하더니
많은 군대를 이끌고 와서도
우리의 적은 군사보다 못 하구나 하면서
이 때부터 위나라를 얕보기 시작했다.
이 때 득래라는 현명한 신하가
동천왕에게 방심하지 말라고 충언을 했다.
하지만 동천왕은 자신만만해하며
위나라 군대를 총공격했다.
위나라군은 무모하게 달려드는 고구려 군을
처음에는 싸움에 지는 척하면서 유인했다.
적의 작전에 말려든 것도 모르고 공격하던
고구려군은 사방에서 갑자기 나타난
위나라 군대에 쫓기는 신세가 되었다.
동천왕이 주위를 살펴보니
왕을 호위하는 장수라고는 밀우 뿐이었다.
위태로운 형세에서 밀우장군이 나서서
자신이 결사대로 적을 막을 것이니
어서 몸을 피하라고 했다.
밀우가 적과 외롭게 싸우고 있는 것을
걱정하는데 유옥구가 나서서
죽음 직전의 밀우를 구해 왔다.
왕은 유옥구가 구해 온 밀우를
자신의 무릎 위에 뉘었다.
한참 만에 밀우가 깨어났고
고구려 군사들은 부하를
진심으로 사랑하는 왕을 보고 힘을 내었다.
이 때 신하인 유유가
나비가 호롱불에 몸을 던져 호롱불을 끄는
그런 방법이 하나 있다고 하면서 계책을 냈다.
유유는 음식을 준비하여 적진으로 가서
거짓으로 항복을 한다고 했다.
항복하러 온 것이 틀림없다고 판단하였는지
위나라 장군은 유유의 말을 믿고
술잔을 건네며 환영한다는 뜻을 표하는데
이 틈을 타서 칼을 꺼내 적장을 죽였다.
유유도 자신의 배를 갈라 자살을 했다.
선봉장이 죽었다는 소문이 나돌자
위나라 군사들은 혼란에 빠지고
고구려가 대승을 하게 되었다.
동천왕이 백성들의 흐느낌 속에서
숨을 거두니 신하들은 물론이요
백성들까지 통곡을 하였다.
그런데 왕을 잃은 슬픔이 거기서만
끝나는 게 아니라 생전에 임금을 가까이에서
모시던 신하들이 같이 무덤에 묻히겠다고
떼를 지어 자살을 했다.
동천왕에 이어 새로 임금이 된 중천왕이
전국에 자살을 금하라는 어명을 내렸다.
그러나 장례날에 이르자
수많은 백성들이 무덤으로 찾아와
자살을 하는 바람에 시체가 산더미처럼
쌓여 나무를 베어 시체를 덮어 주었다.
이후로 그곳을 시체가 쌓인 언덕이란
뜻에서 시원이라 부르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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