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 죽 교 의 충 절
정몽주는 영일현
출신으로
지주사 정습명의
후손이며
어머니 이씨가 잉태했을
때
난초 화분을 안는 꿈을
꾸었기에
몽란 또는 몽룡이라고
불렸다.
천분이 매우 고매하여
성리학의
비조였고
고려왕실의
기둥이었다.
이성계가 사냥을 하다가 낙상하여
병환 중에 있을
때
정몽주가 문병을
마치고
이방원과 대좌하게
되자
"
포은선생 술이나 한 잔
드시며
여러가지 좋은 말씀이나 해주시오
"
이방원이
말하니
" 내가 무슨 대학자라고 좋은 말이
있겠소 " 정몽주가
답하니
" 당대의 대학자이신데
성리학에
대해
좋은 말씀을 좀 해 주시오
"
이방원이 다시 재촉을
하니
" 성리학이라면 심신의
수양이
으뜸이지요 " 라고
답하였으나
학문에 대한 이야기는 잠시일
뿐
화제가 바뀌어 고려조의 정치에
대하여 이야기가 진전되고 있었다.
이방원은
좋은 기회라
생각하고
정몽주의
속마음을 떠보기
위해
시조
한수를 뽑아 내려갔다.
如此亦何如
如彼亦何如
城隍堂後垣
頹已亦何如
我輩岩此爲
不死亦何如
이런들 어떠하며
저런들
어떠하리
만수산 드렁칡이
얽혀진들
어떠하리
우리도 이같이
얽혀져
백년까지
누리리라
다
썩어가는 고려 왕실만 붙들기
위해 고집을 부리지
말고
칡넝쿨처럼 얽혀서
사이좋게
지내는 것이 어떻겠는가 하는
말이다.
정몽주는 노래를 다 듣고
나서
좋은 시라고 칭찬한 다음
젊은 사람의 노래만 듣고
그대로
있을
수 없다면서 화답을 하는데
此身死了死了
一百番更死了
白骨爲塵土
魂魄有也無
向主一片丹心
寧有改理也歟
이몸이 죽고
죽어
일백번 다시
죽어
백골이
진토되어
넋이라도 있고
없고
임
향한
일편단심이야
가실 줄이
있으랴
이로써 두 사람은 서로의
뜻을
알고
헤어졌다.
이방원과 헤어진 정몽주는
돌아오는
길에 자주 출입하던 술집에
들렀다
돌아가는 길에 선죽교의
돌다리에서
조영규의 철퇴를 맞고
쓰러진다.
이때 정몽주의 나이는
63세였다.
그가 선죽교의 돌다리를
점점이
피로 물들이면서 영면한
날이
공양왕 4년 4월 4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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