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효자식을 둔 노왕의 슬픔과 어리석은 판단의 왕과 백작
더 중한 병에 걸려 있으면 그보다 가벼운 병은 좀처럼 느껴지지 않는 법......
마음에 근심걱정이 없을 때에는 육신이 민감해지지만,
내 마음 속에 이처럼 폭풍이 일고 있으니
그곳에서 쿵쾅거리는 것을 제외하고는
다른 모든 감각이 사라지는구나.
리어왕이 마음이 걱정이 크면 육체가 겪는 고통 따위는 느껴지지 않는다는 뜻이다. 딸들의 배신으로 인해 리어왕의 마음속에서 심적 풍랑이 얼마나 거센지를 드러내 주는 대사이다.
인간이 이것밖에 안 된단 말이냐? 저 자를 잘 생각해 보아라.
너는 누에에게 비단도, 짐승에게 가죽도, 양에게 양모도,
사향고양이에게 사향도 빚진게 없구나.
하! 여기 우리 세사람은 가짜로구나.
나는 타고난 그대로인데, 아무것도 걸치지 않은 인간은
너처럼 가난하고, 벌거벗은 두 발 달린 짐승에 불과하구나.
벗어라 벗어. 빌려 입은 겉치레를!
리어왕은 벌거벗은 에드가를 보면서 아무것도 걸치지 않은 순수한 인간의 모습이 구차하고 벌거벗은 짐승에 불과하다는 것을 깨닫는다. 그리고 그것이 인간의 진짜 모습이며, 왕의 화려한 의상을 입고 있는 자신이 겉치장을 한 가짜라고 생각한다. 비로소 리어왕은 한 명의 인간에 불과한 존재임을 깨닫는다.
그놈들은 나에게 개처럼
아첨을 하면서, 검은 수염이 나기도 전에 벌써
흰 수염이 났다고 말했다. 내가 하는 모든 말에
"그러하옵니다." "그렇지 아니 하옵니다." 라고
맞장구쳤지.....
관두자, 그놈들은 언행이 일치하는
작자들이 아니다. 그놈들은 내가 만능이라고 했지만
그건 거짓말이다. 나는 학질에도 걸릴 수 있다.
그리고 가장 궁핍한 자들의 삶을 몸소 체험함으로써 인간 세상에 정의가 존재하지 않음을 느끼고 좀 더 의로운 방식으로 사회를 재정립해야 함을 인식한다.
누더기 사이로는 작은 죄도 훤히 드러나지만,
화려한 옷과 모피 코트는 모든 죄를 감추어 주는 법,
죄에 황금 갑옷을 입혀 보아라.
그러면 제 아무리 튼튼한 정의의 창도
아무 해도 입히지 못하고 부러져 버릴 테니.
하지만 죄에 누더기를 입혀 보아라.
그러면 난쟁이의 지푸라기도
꿰뚫어 버릴 것이다.
세익스피어는 사회비판적이고 정치적인 발언을 시각적 아버지를 통해 비유적으로 표현하고 있다. 광기가 리어왕을 지금까지 세상사에 대해 제대로 파악하지 못하게 하던 허구의 가치들로부터 벗어나게 함으로써 좀 더 심오한 깨달음을 경험하게 해준다. 광란속에서 지혜를 깨닫게 된다. 그러나.....
아니, 아니, 아니, 아니! 자, 감옥으로 가자.
거기서 우리는 단둘이 새장 속에 든 새같이 노래를 하자.
네가 나보고 축복을 해달라면,
나는 무릎을 꿇고 너의 용서를 청하련다.
그렇게 해서 우리는 날을 보내고,
기도하고, 노래하고, 옛이야기를 하고,
금빛 나비같이 화려한 궁중 사람들을 보고 웃고
그 가여운 자들이 궁중 소식을 이야기하는 것을 듣자꾸나.
그러고 나서는 누가 전쟁에 지고, 누가 이기고,
누가 세력을 얻고, 누가 세력을 잃는다고,
그들과 같이 우리도 이야기하면서,
마치 우리가 신의 정탐꾼인 양
인생의 신비를 아는 체하자꾸나.
그러면 우리는 사면을 벽으로 두른 옥 속에 있더라도,
달의 지배를 받아 들락날락하는 밀물 썰물과 같이,
흥망 수상한 거물들의 집단이나 당파보다도 오래 살 것이다.
리어왕에게 다행히 코넬리아를 알아볼 한 줌의 이성은 남아 있다. 그렇다고 해도 그는 영원히 성과 속이 뒤엉킨 현실세계로 돌아오지 못한다. 프랑스군이 패퇴한 후, 코딜리아는 언니들과 대면하길 청한다. 하지만 리어왕은 원치 않는다. 그는 막내딸인 코딜리아에게 함께 감옥으로 갈 것을 권한다. 리어왕은 슬퍼하는 것인지 행복해하는 것인지 알기 어려운 분열적인 정신세계를 보인다.
이제 코딜리아만이 그가 알고 싶은 세상의 전부다. 사랑으로 가득 찬 세계, 온전히 아끼는 두 사람만의 천국을 그린 리어왕의 이 가슴 아픈 대사는 황홀하고 애절하다. 이 순간만큼 비참하고도 행복한 아버지의 광기는 축복이다.
리어왕은 코딜리아를 잃은 왕이 파랑만장했던 삶을 마감하면서 막을 내린다. 가슴은 미어지지만 평정심을 회복하여 살펴보면 리어왕이 미쳐 버리긴 했지만 결국 정의는 구현된 셈이다. 하지만 코딜리아가 목숨을 잃었다. 묵과할 수 없는 부당한 결과를 낳은 것이다.
어째 개도, 말도, 쥐도 다 생명이 있건만
넌 숨을 수지 않는단 말이냐? 너는 다시는 돌아오지 않겠지,
다시는, 다시는, 다시는, 다시는, 다시는 말이다.
코딜리아는 싸늘한 시체가 되어 있었다. 상심한 리어왕은 코넬리아의 시체를 팔에 안고 울부짖는다. 17세기 신고전주의 시대 사람들은 합리적이고 윤리적인 질서가 세계를 지배하고 있다고 믿었다. 그리고 문학작품이 권선징악이라는 정의를 구현해야 한다고 믿었다. 따라서 이 시대 사람들은 코딜리아처럼 아무 죄도 없는 사람들이 희생당하는 내용에 거부감을 일으켰다. 리어왕은 가치관을 상실한 부조리한 극이라 하여 결말 부분을 수용하기 어려웠다. 그리하여 이 시대에는 세익스피어의 리어왕이 아니라 해피엔딩으로 개작한 테이트의 리어왕이 공연되었다.
테이트는 1681년에 당대의 미학적 기호와 정치적 상황에 맞게 리어왕을 과감히 고쳐썼다. 우선 원작의 비극적 결말을 해피엔딩으로 고쳤다. 그럼으로써 왕정복고기의 관객들에게 다소 예민하게 받아들여졌을 군주의 몰락을 피하고, 코딜리아의 무고한 희생이라는 논란도 피해 갔다. 코딜리아가 살아서 에드가와 결혼하도록 설정하고 리어왕은 왕관을 되찾은 뒤 이 두 사람에게 행복하게 왕권을 이양하고 은퇴하는 내용으로 고쳤다. 테이트판 리어왕은 150년 동안이나 세익스피어의 리어왕 대신 영국 무대에 올려졌다.
리어왕과 글로스터백작의 어리석은 분별력은 우리 모두가 똑같이 겪을 수 있는 일이기에 그들에게 연민을 느끼게 된다. "우리는 울면서 이 세상에 태어났다. 바보들만이 득실거리는 이 거대한 무대에 나온 것이 슬퍼서,"라는 리어왕의 탄식은 우리 가슴속에서 쉽게 지워지지 않는다. 우리 자신도 언제든 리어왕이나 글로스터백작 같은 어리석음에 빠질 수 있기 때문에 느끼는 공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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