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의 묵상

불행과 비극 앞에서 익숙해질 수 있는 사람은 결코 없습니다

박남량 narciso 2021. 11. 24. 16:52

불행과 비극 앞에서 익숙해질 수 있는 사람은 결코 없습니다

 

기생초



30
대 러시아 귀족 알렉산드로 로스토프 백작은 모스코바에 자리한 매트로폴 호텔의 스위트 룸 장기 투숙자로 화려한 귀족의 삶을 살아가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볼세비키 시절의 러시아에서 귀족의 삶이란 이미 비극에 한 발을 들여놓고 있는 셈이니 그 역시 예외는 아니었습니다.

몇 년 전에 쓴 시() 한 편이 볼세비키의 눈 밖에 나는 바람에 종신 가택연금형을 선고받았습니다. 그가 연금된 가택은 다름 아닌 호텔이었습니다. 물론 화려한 스위트 룸 대신 창고로나 쓰면 알맞을 방 한 칸이 제공되었습니다. 호텔 안에서는 마음대로 다녀도 되지만 한 발자국이라도 밖으로 나가는 날에는 당장 총살형이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귀족의 삶이 운명의 여신의 손길에 의해 하루아침에 죄수의 삶으로 전락한 것입니다. 그가 택할 수 있는 것은 두 가지밖에 없었습니다. 자살하거나 살아남거나 만약 그가 약간이라도 부정적인 사람이었다면 당장에 목숨을 끊었을 것입니다. 하지만 운명의 여신의 무자비한 손길에도 그는 거의 낭만적이라고 할 만큼 완벽한 긍정주의를 택합니다. 연금된 상태로도 자신만의 인간관계와 할 일을 찾아 밝게 살아가기 시작합니다.

마국 작가 에이모 토울스(Amor Towles)의 장편소설 <A Gentleman in Moscow(모스크바의 신사)>에 실린 이야기입니다. 삶의 무게를 품위 있게 내려놓는 법에 관한 이야기입니다. 운명의 여신이 한번 마음먹으면 그 손길을 피해갈 수 없습니다. 운명의 여신이 가져오는 고난은 혼자서 묵묵히 견뎌내는 것만이 최선이라고 합니다. 하지만 막상 그런 일이 닥쳤을 때 과연 그 말 대로 살아갈 수 있는 사람이 얼마나 될까요? 그리고 운명의 여신의 손길이 됐든 팔자소관이 됐든, 그 앞에서 내 존재 자체가 흔들리는 경험을 하게 된다면 누구인들 내 앞에 놓인 운명의 롤러코스터를 감당하지 못할지도 모릅니다. 남에게 일어나는 힘든 일이 내게도 일어날 수 있으며 그게 인생이라는 것, 단지 누구에게나 일어날 수 있는 일이 확률적으로 나에게 일어난 것뿐임을 받아들인다면 삶의 무게를 조금은 내려놓을 수 있지 않을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