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종과 두 세자빈 휘빈 김씨와 봉씨
문종은 왕위에 오른 지
2년 만에
승하하였다.
문종이 동궁으로 있을
때
김오문의
딸을 세자빈으로 삼았는데
휘빈 김씨이다. 휘빈 김씨는
나이가
동궁보다
많았음인지 시집 온 후부터
남성을 안 데 비하여 동궁은 아직
성에 눈이 트이지
않았다.
밤이 되면 세자빈은 동궁을 품 안에
안아주며 유혹을 함에 동궁이 여자를
알게 되어 궁녀를 찾게 되고 자연
세자빈의 처소에 발길이
뜸해지자
세자빈은 세자를 끌어들일 여러
가지
궁리를 시녀들과 하게
되었다.
한 시녀가
말하기를
「세자가 자주 출입하는 궁녀의
신을
훔쳐다가 그 신을 태워 세자가 잡수시는
술이나 차에 섞어 잡숫게
하면
다시는 그 궁녀의 처소에
출입하지
않는다
하옵니다」
「그렇게 해 보도록
하여라」
그러나 아무 소용이 없었다.
다음은
교미하는 뱀을 잡아
가루를
만들어 먹으면 남자가 따라온다고
하여 그 방법을 써
보았다.
그러나 이 사실은 탄로가
났고
세자빈은 폐서인되어 친가에
내
쫓고
그의 아비 부원군
김오문은
삭탈관직하라는
어명이 내렸다.
김오문의 집에서는
눈물없이는
볼 수 없는 비극이
벌어졌다.
김오문은 세자빈에게 정장을
입히게
한 다음 부인 이씨를
불러놓고
「자식의 잘못은 부모에게도 있는
것이니 우리 세 사람이 모두
함께
죽어 속죄함이
타당하오」
「대감. 너무 억울하고
원통합니다.
다시
한번 생각해 봄이
어떻겠어요」
「조금
있으면 폐빈의 첩지와
나에
대한
파직의 교지가 내려올
것이요.
아직은
첩지와 교지를 받지
않았으니
휘빈마마는
아직 세자빈이요.
당신과
나는
세자 저하의 장인
장모이니
대궐에서
사람이 오기 전에
서두르는
것이
좋을
것이오」
이렇게
부인과 세자빈의 뒤를
이어
김오문이
세상을
하직하였다.
이처럼
여자로 인해 엄청난
풍파가
있은
후 세자는 아무 여자도
없는
상태에서
지내게 되었는데 어느
날
중전
시녀 순임이와 정을
통하였다.
시녀
순임이와 정을 통하는
와중에
봉려의
딸인 봉씨를 새로운
세자빈
으로
맞아들이게
되었다.
세종은
새로운 며느리를 몸집이
작고
유약한
여자라 생각하고
간택하였는데
그녀는
색광이었으며
음탕하였다.
세자빈은
지난 번의 불미스러운
일도
있고
해서 성실할려
하였으나
세자빈
봉씨의 욕구를 만족시킬
수가
없음을
알게 되어 처소 출입이
부담이
되어
발길이 뜸하게
되었다.
쓸쓸해진
세자빈은 구중 궁궐
속의
궁녀들
간에 은밀히
행해지는
동성간의
애정 행위를 하게
되었다.
또한
순임이 세자의 아이를
잉태한
사실을
알고 매질을 가하는
등
행투가
사나워 모든 사실이
중전에게
알려져
중전 소헌왕후가 불러
문초하니
부끄러움도
없이 자기의
소행이
당연한
것처럼 속쉬원히 털어
놓았다.
역시
봉씨는 폐출을 당하게
되었다.
폐빈
봉씨가 친정집에
이르자
폐빈
봉씨의 아비 봉려가 딸을
목졸라
죽이고
딸의 시신을 단정히 수습한
후
자결하였다.
세종 18년 10월의 일이다.
세번째 세자빈은 현덕왕후 권씨이다.
현덕왕후는 경혜공주와 단종을 낳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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