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 산책

문무대왕의 수중왕릉 대왕암 과 만파식적

박남량 narciso 2007. 12. 3. 09:43


문무대왕의 수중왕릉 대왕암과 만파식적


          문무왕은 신라 제 30 대 왕
          그는 태종무열왕의 맏아들로서
          어머니는 김유신의 누이인 문명왕후이다.
          문무왕은 백제와 고구려를 평정하고
          당나라의 세력을 몰아내어
          삼국통일을 완수한 군주이다.
          삼국을 하나로 통일하는 대업을 마무리하여
          통일신라의 찬란한 문화시대를 연 문무왕은

          이때까지 우리 강토는 삼국으로 나누어져
          싸움이 그칠 날이 없었다.
          이제 삼국이 하나로 통합돼 한 나라가 되었으니
          민생은 안정되고 백성들은 평화롭게 살게 되었다.
          그러나 동해로 침입하여 노략질하는 왜구가 걱정이다.
          내가 죽은 뒤에 용이 되어
          불법을 받들고 나라의 평화를 지킬 터이니
          나의 유해를 동해에 장사 지내라.
          화려한 능묘는 공연한 재물의 낭비이며
          인력을 수고롭게 할뿐 죽은 혼은 구할 수 없는 것이다.
          내가 숨을 거둔 열흘 뒤에는 불로 태워 장사할 것이요
          초상 치르는 절차는 검소 와 절약을 쫓아라고
          유언했다고 삼국사기에 기록되어 있다.

          이와 같이 위대한 업적을 남긴 문무왕이
          재위 21년만에 죽자 유언에 따라 동해에 장례를 지냈다.
          그의 유언은 불교법식에 따라 화장한 뒤
          동해에 묻으면 용이 되어
          동해로 침입하는 왜구를 막겠다는 것이었다.
          이에 따라 화장한 유골을
          동해의 입구에 있는 큰 바위 위에 장사지냈으므로
          이 바위를 대왕암 또는 대왕바위로 부르게 되었다.

          이 능은 해변에서 가까운 바다 가운데 있는
          그다지 크지 않은 자연바위이다.
          남쪽으로 보다 작은 바위가 이어져 있으며
          둘레에는 썰물일 때만 보이는 작은 바위들이
          간격을 두고 배치되어 있어 마치 호석처럼 보인다.
          문무대왕릉은 전대의 왕들에게서는
          볼 수 없는 희귀한 예라고 할 수 있다.
          문무왕의 유언은
          엄청난 규모의 무덤을 만드는데 들어가는
          백성들의 수고로움을 덜고
          장례의식을 간편하게 한 것이다.

          또한 「삼국유사」에는 이렇게 씌어 있다.
          신문왕은 아버지 문무대왕을 위하여
          동해 변에 감은사를 세웠다.
          문무왕이 왜병을 진압하고 이 절을 짓다가
          마치지 못하고 돌아가 바다의 용이 되었는데
          그 아들 신문왕이 즉위하여 마쳤다.
          금당 계단 아래를 파헤쳐 동쪽에 구멍을 내었으니
          용이 들어와 서리게 한 것이었다.
          유골을 모신 곳을 대왕암이라 하고
          절은 감은사라 하였으며
          그 후 용이 나타난 것을 본 곳을 이견대라 하였다.

          대왕암은 경북 경주시 양북면 봉길리 해변에서
          약 200미터 떨어진 바다에 있는
          신라 제 30대 문무왕의 수중릉으로
          사적 제 158호로 지정되어 있다.

          대왕암 전설은 신라 삼국통일을 이룬 문무왕이
          나라를 지키기 위해 자신이 죽은 후에도
          용이 되어 나라를 지킬 수 있도록
          자기 무덤을 동해 바다 속에 마련하라는 유언에 따라
          동해 감은사 맞은 편 바다에
          수중릉을 마련하게 된 사연을 이야기하는 전설이다.
          이 전설은 동해에서 실제 수중릉이 발견되면서
          사실로 입증되었다.
          멀리서 보는 대왕암은 평범한 바위섬이지만
          가까이 다가가 보면
          바위 한 가운데가 못처럼 패어 있고
          둘레에 자연암석이 기둥 모양으로
          일정한 간격을 두고 세워진 모습이다.
          못 안에는 거북이 등 모양의 돌이 얹혀져 있다.
          못 안의 물은 돌을 약간 덮을 정도이며
          거센 파도에도 항상 맑고 잔잔히 흐르도록 되어 있다.
          동서남북 사방으로 트인 십자형의 수로를 통하여
          동쪽으로 들어온 물이 서쪽으로 난 수로의 턱을
          천천히 넘어 다시 바다로 흘러나간다.

          대왕암은 죽어서도 용이 되어
          동해를 침입하는 왜구들을 막겠다는
          신라의 문무왕의 능이다.
          세계에서 유일무이한 수중릉이다.
          대왕암자체는 그리크진 않지만
          대왕암위에 올라서보면 중간에 큰 공간이 있다.
          그부분에 큰 돌이 하나가 놓여져있는데
          그 돌밑에 화장한 유골을 묻지않았나 추정하고 있다.
          대왕암 사방으로 수로가 나 있고
          물길이 일정한 방향으로 들어와
          또 일정한 방향으로 나가게끔 되어 있어서
          높은 파도가 쳐도 안쪽공간은 잔잔하다고 한다.

          또한 신문왕은 부왕 문무대왕의 뜻을 이어
          동해 변에 감은사를 창건하여
          부처님의 힘으로 동해의 왜구를 막으려 하였고
          감은사 금당 밑에서 동해를 향해 구멍을 뚫어
          조수가 금당 밑까지 들어오게 하여
          용이 된 문무왕이 조수를 따라
          금당까지 드나들 수 있도록 하였다.

          또 대왕암이 바라보이는 북쪽 언덕 위에는
          이견대가 있는데
          신문왕은 이곳에서 대왕암을 망배하였다.

          신문대왕과 만파식적(萬波息笛)의
          이야기가 전해져 내려오는데
          만파식적이란
          신라시대 전설상의 피리인데
          이 피리를 불면 병란도 물러가고 병이 나으며
          가물 때에는 비가 오고 장마 때에는 비가 개며
          바람과 파도가 잔잔해 지는지라
          이름을 만파식적(萬波息笛)이라 하고
          국보로 지정하였다하는데 이러한 이야기가 전해져 온다.

          신라 제30대 문무왕이 왜적을 진압하기 위해서
          동해가에 절을 지었으나 완공을 보지 못하고 죽어
          해룡이 되었으므로 그 아들 제31대 신문대왕이 완공하여
          절의 이름을 감은사라 하였다.
          다음 해 오월 해관 파진찬 박숙청이
          동해 가운데에 있는 조그만 산이
          물결을 따라 감은사 쪽으로 떠옵니다
          하며 아뢰니 왕이 이상히 여겨 점성관에게 물으니
          돌아가신 부왕께서 바다의 용이 되시어
          삼한을 보호하며
          또 김유신은 삼십삼천의 아들로서
          신라에 내려와 대신이 되었으므로
          두 성인의 덕을 합쳐 나라를 지킬
          보배를 내려 주시려고 함이니
          왕께서 해변에 거동하시면 얻을 것이라 하였다.
          왕이 기뻐하여 그달 7일에 해변가로 나가
          그 산을 살펴보니
          산세는 마치 거북의 머리와 같고
          산 위에 대나무 한 그루가 서 있는데
          밤이면 둘로 되고 낮이면 하나로 합쳐졌다.
          왕이 바다를 건너 그 산에 들어가서
          대나무를 베어와서 피리를 만들어
          이름을 만파식적이라 하고
          월성 천존고에 보관해 두었다.
          역대 임금들이 보배로 삼았다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