망각의 강 레테의 신화 이야기 - 과거도 미래도 삶의 시간은 아닙니다
페루비아나무릇(peruviana)
플라톤의 <국가>는 소크라테스가 소피스트인 글라우콘과 레테 강, 즉 망각의 강의 신화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는 것으로 끝맺습니다. 이 신화에 따르면 지상에 살아가는 모든 인간들은 이전에 모두 완전한 세계에서 살아가던 불멸의 순수한 영혼들이었습니다. 어떤 슬픔, 아픔, 다툼도 없이 마냥 행복한 나날을 보내던 이 영혼들 가운데 일부가 무슨 연유에서인지 (아마 권태와 게으름 탓이었으리라) 죄를 짓게 됩니다. 이 유토피아에서 죄 지은 영혼들은 특별한 방법으로 단죄되는데, 그것은 감옥에 갇히는 것입니다. 물론 영혼계에는 감옥이 없습니다. 그들이 갇히는 감옥이란 곧 육신입니다.
인간으로 태어난다는 것은 영혼이 지상으로 유배되어 육체의 감옥에 갇히는 사건에 지나지 않습니다. 그런데 죄 지은 영혼이 육체라는 감옥에 갇히기 전에 통과해야 할 과정이 있습니다. 그것은 레테 강을 건너는 것입니다. 이 강에는 배가 없어서 각자 스스로 건너야 합니다. 이 강을 건너기 전에 모든 영혼들은 강변에서 강물을 한 모금씩 마셔야 합니다. 레테의 강물에는 신비한 효능이 있으니, 그것을 마시면 영혼은 유토피아의 기억을 깡그리 잊게 됩니다. 그래서 단지 누구누구의 아들, 딸로 태어나서 한 생애를 살아갑니다.
소크라테스에 따르면 이 생애는 영혼이 속죄하는 기회이어야 하며, 결코 욕망대로 살면서 또다른 죄악 속으로 빠져드는 덫이어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그렇게 되면 불교에서나 오르페우스교에서 주장하는 대로 다음 생에서는 짐승이나 벌레와 같은 더 볼품없고 추악한 육신에 갇히는 비극이 일어난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때에도 여전히 마찬가지입니다. 그 영혼은 다시 레테 강에서 그 강물을 마심으로써 전생의 기억을 다시 완벽하게 망각하게 됩니다. 어쨌든 그러한 짐승이나 미물로 태어난다 하더라도 목숨이 있는 한 그것은 속죄의 기회일 뿐입니다. 물론 속죄할 가능성은 그만큼 더 멀어지지만 말입니다.
신화대로라면 우리에게 주어진 이생을 속죄의 기회로 받아들이지 못하는 것은 레테 강 때문입니다. 이 강물을 마시지 않고 그냥 배를 타고 건널 수만 있다면 전생의 기억을 지닌 인간들은 지상에서 살아가는 동안 이 기회를 제대로 활용할 수 있을 테니까.
이처럼 그르친 과거를 기억한다는 것은 우리가 새롭게 시작하는 기회를 갖게 해줄 수 있습니다. 그러나 또 한편, 과거의 기억에 사로잡혀 있는 동안 우리는 현재의 순간을 그 자체로서 사랑할 수 없습니다. 전생의 빚을 갚는 게 현생의 삶이라면 이생에서 우리는 정녕 행복할 수 없는 것입니다.
결국 모파상의 소설 <목걸이>의 주인공 마틸드처럼 과거에 저지른 한 번의 허영을 씻기 위해 나머지 삶을 살아가야 하니까. 그러므로 망각하는 것뿐 아니라 기억하는 것도 똑같이 위험한 것일 수 있습니다.
이왕주의 <철학, 영화를 캐스팅하다>에 실린 그리스신화로 우리에겐 망각의 강이라고 알려져 있는 레테의 강 이야기입니다. 사람이 죽으면 이 레테 강을 건너기 전에 이 강물을 마시는데 그렇게 하면 이승의 일을 모두 잊고 평온을 찾아 저승의 사람으로 다시 태어난다는 것입니다. 니체는 플라톤의 주장을 일소에 부칩니다. 레테 강을 운운하는 신화적 허구와 역사적 사실을 뒤섞은 잡설일 뿐이라고 비판하는 것입니다.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이데아 세계를 불러내는 기억력이 아니라 그것들을 깡그리 지워버리는 망각입니다. 설사 과거가 있다 하더라도 우리가 이 지상에서 행복해지려 한다면 이미 지나가 버린 과거를 철저하게 망각하지 않으면 안 된다는 것입니다. 요컨대 망각이 없으면 행복도 없다는 것입니다.
기억에 매달려 역사가 과잉되면 인간은 인간이기를 멈춘다고 니체는 경고합니다. 니체는 이렇게 말합니다. “뭔가 올바른 것, 건강한 것, 위대한 것, 뭔가 참으로 인간적인 것이 성장할 수 있는 토대는 어느 정도는 망각할 수 있는 능력 속에 있다. 그런 한에서는 우리는 이 능력을 다른 무엇보다 중요하고 근원적인 능력으로 보아야 할 것이다. 망각을 부정한다면 삶 또한 소멸되고 만다. 이 망각의 힘에 의해서 비로소 인간은 인간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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