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의 묵상

누구를 살릴 것인가 어려운 선택이 될 것입니다

박남량 narciso 2016. 9. 30. 13:54


누구를 살릴 것인가 어려운 선택이 될 것입니다



어느 유대인 산모가 출산하려고 하는데 아주 난산이었습니다. 산모는 출혈이 심해 위독한 상태가 되어 몹시 고통을 받고 있었습니다. 그 산모는 첫 아이였습니다. 의사는 산모의 생명이 위독해 아이를 살리려면 산모의 생명을 포기해야 한다고 말했습니다. 태중의 아이를 살리느냐 산모를 살리느냐의 심각한 순간이었습니다.

산모는 자기가 죽더라도 아기만은 살려달라고 부탁했습니다. 의사도 결론을 내릴 수 없었습니다. 결국 결정권은 랍비에게 돌아갔습니다. 이럴 때 랍비가 결정하는 것은  랍비 개인의 결정이 아니라 탈무드 또는 유태 전통이 내리는 결정인 만큼 랍비는 그들에게 반드시 유대인의 전통에 따르겠느냐고 물어 보았습니다. 그러자 부부는 그것이 유태의 가르침이라면 받아들이겠다고 말했습니다.

그래서 랍비는 산모의 생명을 구하고 태아를 희생시키기로 결정했습니다. 산모는 그것을 살인이라고 말했습니다. 그러나 유태의 전통에 의하면 태어나기 전의 아기는 생명이 없는 것이라고 봅니다. 태아는 산모의 일부분에 지나지 않습니다. 생명을 구하기 위해서는 몸의 일부를 잘라 버려야만 할 경우도 있습니다. 유태 전통에서는 그러한 때에는 반드시 산모를 구하도록 되어 있는 것입니다.

그곳에 가톨릭 신부도 있었는데 그는 아기를 구하고 산모를 희생시켜야 한다고 말했습니다. 가톨릭에서는 잉태되었을 때 이미 생명이 생긴다고 보기 때문에 가톨릭의 교리에 따르면 산모는 이미 세레를 받았으므로 구원을 받을 수 있지만 아기는 아직 세례를 받지 않았기 때문에 구원을 받을 수 없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유태의 결정은 올바르지 못한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그들 부부는 랍비의 결정에 따랐고 산모는 생명을 구했습니다. 그 후 그들에게는 곧 귀여운 둘째 아기가 태어났습니다. 생명이 무엇인지 모르는 사람은 아마 아무도 없을 것입니다. 우리는 누구나 생명이 무엇인지를 알고 있으며 그에 대해 아무런 의문도 품지 않습니다. 그러나 사람들이 가진 세계관에 따라 생명을 바라보는 관점이 다를 수 있습니다. 하지만 서로 다른 생각으로 생명을 바라본다 해도 관점의 잣대로 생명의 존귀함을 잴 수는 없는 것입니다. 그것은 사람의 의지나 노력이 아니라 하느님의 자비에 달려 있습니다(로마 9,1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