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의 지혜

내면을 수양하듯이 외양을 가꾸는 일도 소홀히 해서는 안 됩니다

박남량 narciso 2017. 2. 17. 15:30


내면을 수양하듯이 외양을 가꾸는 일도 소홀히 해서는 안 됩니다



조선 중기 학자 삼연(三淵) 김창흡(金昌翕 1653-1722)은 정치 소용돌이에 가족이 해를 입자 벼슬에 뜻을 두지 않고 천하를 돌며 자연 속을 노닐었다. 그러다 보니 유학자다운 복식보다 편한 복장을 하는 일이 많았다. 어느 겨울날 거사 차림으로 시골 마을을 지나는데 선비들이 글을 읽고 있었다.

김창흡(金昌翕)이 절하지 않고 지나가자 시골 선비들이 그를 불렀다. 도대체 뭐하는 사람이기에 선비 앞을 지나면서 절도 하지 않느냐는 것이었다. 그러면서 만약 한시를 짓는다면 용서할 것이로되 그렇지 못하면 매를 치겠노라 욱박질렀다.

김창흡(金昌翕)은 운자(韻字)를 부르면 거기에 맞춰 시구를 지어 보겠다며 빙긋 웃었다. 선비들은 즉시 붉을 홍(紅) 자(字)를 불렀고 말이 떨어지기 무섭게 김창흡(金昌翕)이 시(詩) 한 구절을 지었다.

"雪滿山中稚頭紅(설만산중치두홍)  눈이 가득한 산속에 꿩의 머리가 붉다."는 뜻이다.

선비들은 또다시 붉을 홍(紅) 자(字)를 불렀다. 김창흡(金昌翕)은 이렇게 대답했다.

"汲水山僧手指紅(급수산승수지홍) 물 깊은 산속 스님의 손가락이 붉다."는 뜻이다.

한겨울 눈 속에 붉은 꿩의 머리가 선명한 색채 이미지를 부각한 것이라면, 물 긷는 스님의 붉은 손가락은 한겨울 추위가 매서운 산속 풍경을 잘 포착하고 있다. 이쯤에서 상대방이 범상치 않다는 걸 시골 선비들이 알아챘다면 좋았을 것이다. 그런데 그들은 붉을 홍(紅) 자(字)를 한 번 더 불렀다. 그러자 김창흡(金昌翕)은 이렇게 답했다.

"書堂學士鼻頭紅(서당학사비두홍)  서당 선비들의 코끝이 붉다."는 뜻이다.

짓궂게 운자(韻字)를 부르는 시골 선비들을 넌지시 꾸짖고 김창흡(金昌翕)은 그 자리를 훌쩍 떠났다.

좋은 생각에 실린 강원대 교수인 김풍기님의 <한시의 멋>이라는 글을 인용하여 나눕니다. 같은 사람인데도 어떤 옷을 입었느냐에 따라 평가가 달라진다면 우리는 그 사람이 아니라 그의 옷을 평가하는 것이며 인품은 내면의 아름다움에서 우러나는 것이지 겉모습의 화려함에서 나오는 게 아닙니다. 누구나 알고 있지만 실천하기 쉽지 않는 진리입니다.

인간은 본래부터 평등의 지혜와 거룩한 존엄성을 갖추고 있습니다. 사람의 겉모습을 보고 사람을 평가한다면 이는 인간의 존엄성에 대한 모독입니다. 김창흡(金昌翕)의 겉모습을 보고 망신 주려 했던 시골 선비들을 통해 오늘의 삶을 돌아보세요. 한편 그런 이들을 멋진 시(詩)구절로 눌러 준 김창흡(金昌翕)의 문학적 풍류 역시 본받을 만하지 않습니까.

그러나 내면을 수양하듯이 외양을 가꾸는 일도 소홀히 해서는 안 됩니다. 왜냐하면 사람들은 사물의 본양(本樣)을 보기도 전에 겉모습만 보고도 쉽게 판단해 버리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뛰어난 능력이 잘 띄게 한다면 더 좋은 평가를 얻을 수 있습니다. 외양을 보여주지 않으면 응당히 받아야 할 존경을 받지 못하는 경우가 있다는 것입니다.

세상에는 현명함과 지식을 갖추기보다 겉모습으로 남의 눈만 속이려는 사람들이 더 많습니다. 허위와 위선이 득세하는 세상에서는 겉만 보고 판단할 뿐 본양(本樣)에는 크게 관심을 갖지 않습니다. 그래서 아무리 훌륭한 재능을 가진 사람이라 할지라도 그것을 사람들에게 들어낼 방법을 생각하고 그렇게 되도록 노력하여야 할 것입니다.
<꽃사진: 카멜레온 포체리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