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학의 즐거움과 고산의 아름다움을 노래한 고산구곡가(高山九曲歌)
조선 선조 때 학자 퇴계(退溪) 이황(李滉 1501-1571)과 함께 조선 성리학의 대가로 불리는 율곡(栗谷) 이이(李珥 1537-1584)가 해주 고산의 석담에 은거할 때 지은 작품입니다. 세상 사람들이 자연의 아름다움을 몸소 느끼고 학문 수양과 진리 탐구에 더욱 힘쓰기를 바라는 마음을 담고 있습니다. 아침과 저녁, 사계절을 배경으로 아름다운 자연 속에서 풍류를 즐기는 여유로운 모습을 노래하는 동시에 학문 수양과 후진 양성에 힘쓰고자 하는 학자다운 면모도 함께 드러내고 있습니다.
◈고산 구곡담(高山九曲潭)을 사람이 몰으든이, 주모복거(誅茅卜居)하니 벗님네 다 오신다. 어즈버 무이(武夷)를 상상(想像)하고 학주자(學朱子)를 해오리라.
고산구곡가를 짓게 된 동기 - 고산의 구곡담을 세상에서 아는 이가 없었는데, 풀을 베어 내고 터를 닦고 집을 지어 살 곳을 정하였더니, 친구들이 모두 여기에 모여드네. 송(宋)나라 유학자 주희(朱熹 1130-1200)의 무이구곡담(武夷九曲潭)의 배경이 되는 무이산(武夷山)이 여기라고 마음속으로 생각하며, 주희(朱熹)처럼 학문을 해보리라.
◈일곡(一曲)은 어드매고 관암(冠巖)에 해 빗쵠다. 평무(平蕪)에 내 거든이 원근(遠近)이 글림이로다. 송간(松間)에 녹준(綠樽)을 녹코 벗 온 양 보노라.
산머리 바위(冠巖)에서의 아침을 즐기는 모습 - 일곡은 어디메뇨, 관암(冠巖)에 햇빛 비쳤고나. 완만한 풀밭에 안개 개자, 먼산이 그림같이 드러나네. 소나무 아래 술자리 마련해 놓고 벗이 오기만 기다리네.
◈이곡(二曲)은 어듸매고 화암(花巖)에 춘만(春滿)커다. 벽파(碧波)에 곶츨 씌워 야외로 보내노라. 사람이 승지(勝地)를 몰온이 알게 한들 엇더리.
꽃빛 어우러진 바위(花巖)의 봄 경치를 알리고 싶은 마음 - 이곡은 어디멘가. 화암(花巖)에 봄이 저물었구나. 푸른 시냇물에 산꽃이 떨어져서 들녘 멀리로 흘러가네. 이 좋은 땅을 사람들이 모르는데, 꽃잎이 흘러가 남이 알면 어떠하겠는가.
◈삼곡(三曲)은 어드매고 취병(翠屛)에 닙 퍼졋다. 녹수에 산조(山鳥)는 하상기음(下上其音)하는 적의 반송(盤松)이 수청풍(受淸風)이 녀름 경(景)이 업세라.
초록의 병풍 같은 산허리(翠屛)와 키가 작고 사방으로 가지가 퍼지는 소나무(盤松)의 시원한 여름 경치에 대한 감탄 - 삼곡은 어디멘가, 취병(翠屛)에 잎이 벌써 피었네. 푸른 나무에는 산새가 있어 소리를 낮추었다 높였다 하며 노래를 부르니, 반송(盤松)에서 맑은 바람 불어오니 여름의 경치가 시원하기 그지 없다.
◈사곡(四曲)은 어듸매고 송애(松崖)에 해 넘거다. 담심암영(潭心巖影)은 온갓 빗이 잠겻셰라. 임천(林泉)이 깁도록 죠흐니 흥을 계워 하노라.
소나무 빽빽한 낭떠러지(松崖)에 해질 무렵 절경 - 사곡은 어디메뇨, 송애(松崖)에 해는 서쪽으로 넘어가네. 못 속의 바위 그림자는 거꾸로 비치니, 색색이 다 물에 잠겼고나. 숲과 샘물은 깊을수록 더욱 좋으니, 깊은 흥취를 스스로 억제하기 어려워라.
◈오곡(五曲)은 어듸매고 은병(隱屛)이 보기 죠희. 수변정사(水邊精舍)는 소쇄(瀟灑)함도 사이 업다. 이 중에 강학(講學)도 할연이와 영월음풍(詠月吟風) 하올이라.
숨은 듯이 병풍처럼 둘러 있는 절벽(隱屛) 물가에 세워진 배움의 집(水邊精舍)에서의 강학과 영월음풍(詠月吟風) - 숨은 듯이 병풍처럼 둘러 있는 절벽이 좋구나. 물가에 정사가 있나니, 맑고 깨끗한 마음(瀟灑) 한량없네. 이 곳에서 학문도 가르치고, 맑은 바람과 밝은 달을 노래하며 지내리라.
◈육곡(六曲)은 어듸매고 조협(釣崍)에 물이 넙다. 나와 고기와 뉘야 더욱 즑이는고. 황혼에 낙대를 메고 대월귀(帶月歸)를 하노라.
조협에서의 풍류 - 육곡은 어디멘가, 낚시하기 좋은 골짜기에 물이 많이 있구나. 사람과 물고기는 그 즐거움이 누가 더 많은지. 황혼에 낚시대 메고 나갔다가 달빛을 받으며 돌아오네.
◈칠곡(七曲)은 어듸매고 풍암(楓巖)에 추색(秋色) 죠탸. 청상(淸霜)이 엷게 친이 절벽(絶壁)이 금수(錦繡)이로다. 한암(寒巖)에 혼자 앉아 집을 닛고 잇노라.
단풍 어우러진 바위(楓巖)의 가을 정취에 대한 감탄 - 칠곡은 어디메뇨, 풍암에 가을빛 선명하다. 맑은 서리가 살짝 내리니, 절벽이 비단빛으로 수놓은 듯하네. 차가운 바위에 혼자 앉아 보니 애오라지 집을 잊고 있구나.
◈팔곡(八曲)은 어듸매고 금탄(琴灘)에 달이 붉다. 옥진금휘(玉軫金徽)로 수삼곡(數三曲)을 노론 말이. 고조(古調)를 알 리 업쓴이 혼자 즑여 하노라.
거문고 타는 소리(琴灘)와 아름다운 물소리 - 팔곡은 어디멘가, 거문고 타는 소리에 달이 바로 밝았다. 옥으로 만든 진(軫)과 금박으로 박은 휘(徽)의 좋은 거문고로 두서너 곡조 타며 노니, 옛 가락을 알 사람 없으니, 혼자 즐기고 있노라.
◈구곡(九曲)은 어듸매고 문산(文山)에 세모(歲暮)커다. 기암괴석(奇巖怪石)이 눈 쏙에 뭇쳣셰라. 유인(遊人)은 오지 아니하고 볼 것 업다 하드라.
문산(文山)의 눈덮인 경치 - 구곡은 어디메뇨, 문산에 한 해가 저무는구나. 기암과 괴석이 눈 속에 묻혔으니, 놀러다니는 사람은 오지 않고 볼 것 없다 하네.
고산구곡가(高山九曲歌)의 바탕에는 송(宋)나라 유학자 주희(朱熹 1130-1200)가 있습니다. 주희(朱熹)는 무이구곡(武夷九曲)에 정사를 짓고 은거하면서 무이산(武夷山)의 기이한 절벽과 계곡의 아름다움을 무이구곡도가(武夷九曲櫂歌)를 지어 찬탄했습니다. 율곡(栗谷) 이이(李珥)의 고산구곡가(高山九曲歌) 역시 자연을 벗하며 주자학에 대한 학구적 열의를 나타낸 연시조(10수)로 교훈적인 시조입니다. 율곡(栗谷) 이이(李珥)의 정감과 정신이 객관적 서술과 무기교의 담담함 속에 응축되어 있습니다. 마지막 구절인 "유인(遊人)은 오지 아니하고 볼 것 업다 하드라."에서 포용의 감정을 표하였습니다. 퇴계(退溪) 이황(李滉)의 도산십이곡(陶山十二曲)과 쌍벽을 이룹니다.
<사진: 이성길의 무이구곡도(武夷九曲圖) 부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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