효자 열녀 등 미풍양속은 언제부터일까
고려 성종이
즉위하자
송나라와의 문물교역이
활발해졌으며
송나라의 제도를 따라 모든
제도가
제정되기도
하였다.
왕의
탄신일을 천춘절이라
하여
크게
잔치를 벌이고 왕권의
위엄을
과시하는 풍습이 처음으로
생겼다.
특히 효자 열녀 등 미풍양속을
간직
시키기 위한 제도적 뒷받침도
있었다.
이러한 품행을 자랑으로
여기는
사람이 많이
나왔다.
전라도 구례에 사는 손순홍이란
사람은
자기 모친이 병환으로 세상을
떠나자
어머니를
못잊어 자기의
손으로
어머니의
초상화를
그리어
1일 3회씩 그 앞에
절하고
3일에 한번씩 산소에
성묘하였다.
손순흥은 신라말기 손돈의
유복자로서
천성이
어질고 효심이
지극하였다.
어머니가
삯바느질로 가정을
꾸렸는데
계속되는 삯바느질로 어머니가
몸져눕자
지리산을
헤매며 좋다는 약을
구해
어머니께 드렸지만 워낙 병이
깊어
차도를 보이지 않아 쾌차하기를
빌다가
깜박 잠이
들었습니다.
이때 백발노인이
나타나
" 순흥아 너의 효성이 지극하여 도우러 왔다.
지리산 골짜기에 호랑이처럼
생긴
바위가 있는데 그 바위 왼쪽에
산삼이
있을터이니 캐어다 다려
드리면
곧 병환이 나을 것이다 " 하고
말하는
것이었다. 순흥이 놀라 깨어보니
꿈이었다.
순흥은 꿈이 하도
이상하여
노인이
가르쳐 준 골짜기로 달려가
보니
과연 산삼이
있었다.
순흥은 정성껏 어머니께
드렸드니
어머니는 거짓말처럼 건강을
회복하였다.
이러한 순흥의 효는 세상에 널리
알려져
성종임금께서 조서를 내렸는데
- 구례 백성 손순흥은 그 모친이 살았을
때는 하늘이 감동할 정성을 다 하였으며
그 모친이 죽으매 화상(畵像)을 그려
제사를 받들었고 3일에 한번씩 무덤에
나아가 제사를 드리되 생존시와 같이
한다하니 마땅히 벼슬을 주고
그 효성을 선양하리로다 -라 하였으며
그리고 서기 997년에는 효자비와 정문을
내렸다. 손순흥의 효자비는
구례읍 봉북리 마을 어구에 세워져 있어
지금도 효의 상징으로 역할을 하고 있다.
또 송도 서부 모란리에 사는
박광렴의 어머니가 세상을 떠나자 아들
광렴은 어머니를 생각하며 매일 산소에
나가 절하고 돌보고 있을 때
산소 옆에 있는 고사목이 마치 어머니의
모양같이 보이는 것이었다.
자세히 살펴보니 틀림없이 나무였으나
때때로 어머니의 환상이 나타났다.
박광렴은 어머니를 잊을 수가 없어
그 나무를 업고 집으로 돌아와
마루 위에 정성스레 올려 놓았다.
다시 쳐다보니 어머니의 모습이 나타났다.
큰 소리로 불러보니 대답은 없고
오직 모습만 나타날 뿐이었다.
다시 손으로 만져 보았으나 다만 싸늘한
나무만 서 있을 뿐이었다.
그러나 박광렴이 어머니를 부르면 여전히
나타났는데 이 광경을 본 사람들은 모두
어머니에 대한 효성이 지극하여 감동된
것이라고 칭찬을 아끼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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