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늘이 버린 것은 이미 건질 수 없다
후한(後漢) 말 산서성(山西省) 태원(太原)에 곽태(郭泰 128-169, 字 林宗)라는 지식인이 있었다.
담론을 잘하고 음율을 좋아했으며 가난하여 옷은 몸을 가리지 못할 정도로 곤궁하였지만 학문의 도를 즐겼다. 성질이 밝은 것으로 사람들에게 알려지면서 학문을 연구해 덕을 닦는 선비의 무리들을 가르치기를 좋아했다. 학문이 깊고 견식이 높으며 더구나 언변에 능했기 때문에 조정과 각지의 관청에서는 그를 등용하려했다.
후한서(後漢書) 곽태전(郭太傳)에 실린 내용이다.
[임종(林宗)에게 벼슬하기를 권하는 사람도 있었다. 그러나 임종(林宗)은,
나는 평소 밤에는 천문(天文)을 관찰하고 낮에는 인간이 하는 일을 지켜보아 왔다.
하늘이 버린 것은 이미 건질 수가 없다.] 라면서 어떠한 벼슬도 하려 들지 않았다.
곽태(郭泰)는 내가 천문과 인간 세상을 관찰하기에는 하늘이 버린 바는 지탱할 수가 없는 것이라면서 끝내 병을 핑계로 벼슬하기를 거부했다.
후한(後漢) 말기에는 환관(宦官)과 고관들이 권력 투쟁에만 급급하여 정치를 돌보지 않고 황실은 무능하여 그 위신은 땅에 떨어져 있었다. 또 각지의 지방 장관과 군벌들도 사리 사욕에 눈이 어두워, 이 때문에 힘도 없고 이름도 없는 서민은 도탄에 빠져 고통을 겪고 있었다. 전국 어디를 가도 세기말적 현상이 일어나 그야말로 혁명 전야의 양상을 드러내고 있었다.
이런 가운데서 신시대의 도래를 예견하고 있던 것이 곽태(郭泰)와 같은 진보적인 문인과 동탁(董卓)이나 조조(曺操) 등의 풍운아적 무인이었다. 마침내 대대적인 농민 반란인 황건적(黃巾賊)의 난이 발발하자 혁명적인 무인들은 칼을 들고 궐기했고 문인들은 재야에서 사회를 계몽하기 시작했다. 그리하여 하늘이 버린 한왕조(漢王朝)는 결국 붕괴되기에 이르렀던 것이다.
참으로 그냥 흘려 듣는 한갓 그냥 전해 오는 한 옛이야기로만 들을 것이 아니다.
그리고 가르칠 성질의 옛이야기도 아니다.
정치하는 사람들, 탐욕으로 그들을 따르는 사람들, 깨우치기만 하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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