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의 지혜

말 없이 듣기만 하는 교실에는 앵무새밖에 자라지 않는다

박남량 narciso 2014. 7. 17. 08:09


말 없이 듣기만 하는 교실에는 앵무새밖에 자라지 않는다








탈무드에 있는 두 나그네의 이야기이다.

두 나그네는 배고픔을 안고 어떤 외딴집을 발견했다.
안에 들어가 보니 집 안은 아무도 없이 텅 비었는데 높은 천장에 과일이 든 바구니가 매달려 있었다. 그러나 아무리 손을 뻗쳐 보아야 과일에 닿을 수가 없었다.

그러자 한 나그네는 화를 내고 그 집을 나가 버렸다. 그러나 또 한 나그네는 그와 달랐다.

너무나 배가 고파 몸을 움직일 기운도 없었지만 천장에 과일바구니가 매달려 있으니 누군가가 거기다 걸어 놓았음이 틀림없다고 판단하고 집 안을 이리 저리 찾아 보았다.
마침내 사다리 하나를 찾아내서 그것을 갖다 놓고 올라가 과일 바구니를 내려 그것을 찬찬히 맛보았다.


르스시로의 유태인의 천재교육(학원사/1983)에 실린 이야기를 옮겨 함께 나눕니다. 유태인의 아이들은 손이 닿지 않는 곳에 매달려 있는 과일처럼 어려운 일을 하도록 자극받는다. 사다리를 한단 한단 오르는 것처럼 질문을 거듭하여 한 발자국씩 문제에 가까이 가게 가르친다. 그리하여 마침내는 지식에 닿게 되는 것이다.

학교 다닐 때의 일을 생각해 보자.
우리 어머니는 뭐라고 말하며 우리를 학교에 보냈을까? 「선생님 말씀을 잘 들어요」하고 말하였다.
교실 안에서 선생님 말씀을 말 없이 듣고만 있었다.
선생님의 가르침을 듣기만 할 뿐이었지 아무 의문도 갖지 않았을 것이다.
선생님의 일방통행식 가르침으로 학생들은 앵무새로 길러지고 독창성이 없는 인간으로 만들어진 것은 아닐까 하는 염려를 낳게 한다.

유태인의 어머니는 우리의 교육과는 딴판이다.
유태인의 어머니는 뭐라고 말하며 아이를 학교에 보낼까? 「선생님에게 자주 물어보아요」하고 학교에 보낸다.
유태인의 아이들에게 요구되는 것은 암기가 아니라 이해하는 능력이다.
선생은 학생에게 문제를 던져 주고 학생은 그것을 풀며 모르는 일은 묻고 또 물어 이해하는 것이다.

어머니와 선생님의 대화를 생각해 보자.
「누구는 어쩌면 그렇게도 얌전하고 착할 수가 있습니까?」선생은 칭찬의 말을 한다.
「누구는 수업시간에 초롱초롱한 눈빛으로 말을 잘 들어요」하고 계속하여 선생은 칭찬의 말을 쏟아낸다.
어떻다는 것일까?
침묵만 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부끄러움을 잘 타고 남의 앞에서 말을 못하고 언제나 얌전하게만 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수줍고 젊잖은 것은 분명하게 말을 못한다는 것이다.
밖을 향해서 자기 마음을 열지 못한다는 것이 아닐까.
침묵은 지식에 대한 욕구의 결여라고 볼 수 있다. 아이들은 무엇이고 서슴없이 물어보는 습관을 들이도록 해 주어야 한다. 그렇게 함으로써 나는 배우고 싶다는 신호를 계속 보내는 것이 된다.

그런데 선생님은 어떨까? 아이들이 자꾸 질문을 하면 좋아할까?
「말이 많아요」,「질문이 많아요」하면서 수다스러운 아이로 평가하지 않을까?
선생님과 학생들이 주고 받는 말이 활발하면 할수록 교육의 효과는 오르게 된다.
아이들이 자꾸 질문을 하는 것은 이해하려고 하는 의욕이 나타나는 것이다. 선생님이 받아주어야만 비로소 정말 배울 수 있는 것이 아닐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