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의 묵상

채미가(采薇歌)와 절의가(節義歌)

박남량 narciso 2015. 3. 27. 09:28


채미가(采薇歌)와 절의가(節義歌)


채미도(采薇圖)
이당 (李唐 1066~1150 宋)

백이(伯夷) 와 숙제(叔齊) 두 형제가 불의(不義)로 천하를 얻은 무왕(武王)의 주(周)나라 곡식을 먹을 수 없다 하여 수양산(首陽山)에 숨어 고사리를 캐 먹다가 굶어 죽었다는 이야기는 너무도 유명하다. 사기(史記) 백이숙제열전편(伯夷叔齊列傳篇)에서 사마천(司馬遷)은 이렇게 쓰고 있다.

공자(孔子)는 말하기를 『백이(伯夷) 와 숙제(叔齊)는 不念舊惡 지나간 잘못을 생각에 두지 않았다. 그래서 사람들이 그들을 원망하는 일이 적었다.』라고 하고, 또 말하기를 『求仁得仁  어진 바라고 어진 일을 했으니 무슨 원망이 있겠는가.』라고 했다. 그러나 나는 백이(伯夷) 숙제(叔齊)가 겪은 일들을 슬퍼하고 있으며, 기록에 없이 전해 오고 있는 그의 시를 읽어 보고 공자(孔子)가 한 말에 의식을 품지 않을 수 없다.

그들의 전기에 보면 이렇게 말했다. 백이(伯夷) 와 숙제(叔齊)는 상(商)나라 초기에서 주(周)나라 말기 사이에 있었던 고죽국(孤竹國)이라는 제후국의 왕자였다. 왕은 아우인 숙제(叔齊)에게 나라를 물려 주려 했다. 왕이 죽자, 숙제(叔齊)는 형인 백이(伯夷)에게 뒤를 이으라고 하였다. 그러나 백이(伯夷)는 아버지의 명이라면서 피해 숨어 버렸다. 숙제(叔齊)도 임금 자리에 앉기가 달갑지 않아 피해 숨었다.그래서 신하들은 가운데 아들로 임금을 세웠다.

그러자 백이(伯夷) 와 숙제(叔齊)는 뒷날의 문왕(文王)인 서백(西伯)이 늙은이 대우를 잘 한다는 말을 듣고 주(周)나라로 갔다. 그런데 서백(西伯)이 죽자 그의 아들 무왕(武王)이 문왕(文王)의 위패를 수레에 싣고 온 은(殷)나라의 주왕(紂王)를 쳤다. 백이(伯夷) 와 숙제(叔齊)는 무왕(武王)의 말고삐를 잡고 옳지 못하다는 것을 말하였다. 모두 백이(伯夷) 와 숙제(叔齊)를 죽이려 했으나 총대장인 태공(太公)이 『이들은 의로운 사람이다.』하고 붙들어 돌려보냈다.

무왕(武王)이 주(紂)를 무찌르자 모두 주(周)나라를 종주국으로 떠받들었다. 백이(伯夷) 와 숙제(叔齊)는 반역과 살육으로 천하를 차지한 무왕(武王)의 지배 아래 사는 것이 부끄러운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도의상 주(周)나라의 곡식을 먹을 수 없다 하고, 수양산(首陽山)에 숨어 고사리를 캐어 먹었다. 백이(伯夷) 와 숙제(叔齊)가 굶주려 죽을 무렵 노래를 지었다. 그리고 마침내 수양산(首陽山)에서 굶어 죽었다.

登彼西山兮      서산에 올라
采其薇矣         고사리를 캐도다
以暴易暴兮      모진 것으로 모진 것을 바꾸고도
不知其非矣      그것이 잘못인 줄 알지 못하니
神農虞夏         신농의 소박함과 우하의 사람이
忽然沒兮         하루 아침에 없어지고 말았으니
我安適歸矣      나는 장차 어디로 갈 것인가
于嗟徂兮         아아 슬프다. 이젠 가리라.
命之衰矣         어찌할 수 없는 운명이구나.


백이(伯夷) 와 숙제(叔齊)가 지은 채미가(采薇歌)의 내용이다. 시로 미루어 볼 때 과연 원망이 없었다고 볼 수 있겠는가, 혹은 또 말하기를 『하늘은 항상 착한 사람을 편든다.』고 한다. 그렇다면 백이(伯夷) 와 숙제(叔齊)는 과연 착한 사람일 수 있겠는가. 이상이 사마천(司馬遷)의 백이(伯夷) 와 숙제(叔齊)에 대한 비평이다. 여기에는 사마천(司馬遷) 자신의 세상에 대한 울분이 깃들어 있다.

사기(史記) 백이숙제열전편(伯夷叔齊列傳篇)에 전하는 古事에서 유래하였다. '고사리를 캐는 노래'라는 뜻으로 절의지사(節義之士)의 노래를 일컫는 말이다. 그러나 청대(淸代)의 유명한 고증학자인 고염무(顧炎武)의 고증에 의하면 무왕(武王)이 주(紂)를 치러 갔을 때는 백이(伯夷) 와 숙제(叔齊)는 이미 죽고 세상에 없었다고 한다. 결국 후세 사람들이 만들어 붙인 이야기에 불과하다고 주장했다.

조선 전기의 문신이자 사육신(死六臣)의 한 사람인 성삼문(成三問)의 시화(詩話)가 백이(伯夷) 와 숙제(叔齊)의 채미가(采薇歌)의 이야기와 함께 전해지고 있다. 세조(世祖)의 단종(端宗 1441-1457) 폐위에 항거하여 은유적으로 드러낸 절의가(節義歌) 또는 충의가(忠義歌)이다. 성삼문(成三問)이 중국에 갔던 길에 백이(伯夷) 와 숙제(叔齊)의 무덤 앞에 찬양의 비문이 새겨진 빗돌에다 다음과 같은 시를 지어 붙였다고 한다. 그랬더니 빗돌에서 땀이 비 내리듯 흘렀다고 한다.

수양산(首陽山) 바라보며 이제(夷齊)를 한(恨)하노라
주려 주글 진들 채미(埰薇)도 하는 것가
비록에 푸세의 것인들 긔 뉘 땅에 났더니


<수양산을 바라보면서 백이와 숙제를 오히려 지조가 굳지 못하다고 나는 꾸짖으며 한탄한다. 차라리 굶주려 죽을지언정 고사리를 뜰어 먹어서야 되겠는가? 비록 산에 자라는 풀이라 하더라도 그것이 누구의 땅에서 났는가?>

따지고 보면 곡식이나 고사리나 별 차이가 없는 물건이다. 형식에 불과한 공연한 좁은 생각이요 위선이기도 하다. 그래서 백이(伯夷) 와 숙제(叔齊)의 영혼이 바로 죽지 못하고 고사리로 연명을 한 자신들의 소행이 너무도 안타까워 땀을 흘렸다는 이야기가 되었다. 사육신(死六臣)의 주동 인물인 성삼문(成三問)이니만큼 있음직한 이야기이다.

성삼문(成三問)은 세조(世祖 1417-1468)가 단종(端宗)을 폐위시키고 스스로 왕위에 오르자, 단종(端宗) 복위운동을 계획하였다. 그러던 중 세조(世祖)가 상왕인 단종(端宗)과 함께 창덕궁에서 명나라 사신을 위한 잔치를 열기로 하자, 그날을 거사일로 정하였다. 거사에 차질이 생기자 함께 모의했던 김질이 그의 장인 정창손과 함께 세조(世祖)에게 밀고하여 모의자들이 모두 잡혀갔다. 성삼문(成三問)은 모의 사실을 시인하면서 세조(世祖)가 준 녹(祿)은 창고에 쌓아두었으니 모두 가져가라 하였다. 성삼문(成三問)은 모진 고문을 당하였으나 조금도 굴하지 않고 세조(世祖)의 불의를 나무라고 또한 신숙주(申叔舟 1417-1475)에게는 세종(世宗 1397-1450)과 문종(文宗 1414-1452)의 당부를 배신한 불충을 크게 꾸짖었다. 그가 형을 당한 뒤 그의 집을 살펴보니 세조(世祖)가 준 녹(祿)이 고스란히 쌓여 있었을 뿐 가재라고는 아무것도 없었다고 한다. 이렇게 끝까지 죽음으로 의로움을 지킨 성상문(成三問)의 자세가 고스란히 담겨 있는 절의가(節義歌)이다. 충의가(忠義歌)라고도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