렘브란트와 아브라함의 제사
게르하르트 폰 랏의 아브라함의 제사(Gerhard von Rad의 Das Opfer des Abraham/1998)에 담긴 렘브란트(Rembrandt Harmenszoon van Rijn 1606-1669)의 아브라함과 이사악의 성서 이야기를 소재로 삼은 그림들이다.
아브라함과 이사악
1645, 동판화
아브라함이 이사악과 대화하는 동판화는 1645년 작이다. 둘은 산 위에 도착했는데 아브라함은 화로를 뒤에 놓았고 이사악은 장작단을 손에 쥔 채 땅에 대고 있다. 여기서 렘브란트는 성서 저자가 말하지 않은 무엇을 묘사하고 있다. 그것은 부자간에 있을 수밖에 없었던, 우리 상상력으로는 물론 그 내용을 말하기 어려운, 대화이다. 아브라함은 이제 마침내 이사악에게 말해야 하는 것이다. 두 사람의 눈의 꼭 중간에는 위를 가리키고 있는 아브라함의 손가락이 있다. 다른 손으로는 제 가슴을 짚고 있다. 이사악은 아직 무슨 소린지 잘 알아듣지 못하고 있다. 듣고 있기는 하나 꼼짝않고 서서 거의 멍청하게 바라보고만 있다. 어떤 흥분을 드러낼 만한 움직임이란 조금도 안 보인다. 손도 가만히 있다. 그러나 이사악의 얼굴은 어두워진다. 이사악 모습의 배경에 피어오르는 어두움도 감상자는 놓치지 않을 것이다. 그리고 이사악은 낭떠러지 가에 바싹 서 있지 않는가.
아브라함의 희생
1636, 뮌헨 고미술관
뮌헨 고미술관에 걸려 있는 이 큰 유화는 적잖이 복잡한 내력이 있다. 렘브란트가 1635년에 그렸던(레닌그라드에 있는 그림) 것을 한 제자가 다소 자유롭게 베꼈었다. 이렇게 모사한 것을 렘브란트는 1636년에 다시 만져 덧칠한 것이다. 이 그림은 렘브란트가 이 사건을 가장 극적으로 형상화해 놓은 것이다. 그 외적 사건에 있어서나 내적 움직임에 있어서나 이야기의 절정이 지니고 있는 광기어린 사나움이 나타난다. 아브라함의 무서운 결의는 모든 인정의 동요를 억눌렀다. 거의 천사에게 훼방받는 게 싫을 지경이다. 눈은 크게 부라리고 있다. 천사는 아브라함의 손목을 꼭 붙잡아야 한다. 칼이 벌써 떨어지고 있기는 하지만-아직 공중에-아비의 왼손은 아직도 손가락으로 이사악의 얼굴을 단단히 움켜쥐고 목을 사정없이 뒤로 젖히고 있다. 천사에게서 나가는 밝은 빛은 칼로 치려고 드러낸 목에 떨어지고 있다.
아브라함의 집행
1655, 소묘
앞에 소개한 동판화와 유화는 극히 공들여 되어 있는 데 비해 이 소묘는 렘브란트가 아마 그 자리에서 단숨에 그려냈을 것이다. 관상자는 장면을 뒤에서 비스듬히 보게 된다. 이사악은 무릎을 오므리고 제단 위에 누워 있다. 그러고 있어도 이사악에게는 바닥이 짧다. 다른 쪽 끝에 머리가 나와 늘어져 있는 것을 보면 안다. 그러나 희생을 집행하기에는 오히려 그것이 편하다. 목이 저절로 젖혀져 있기 때문이다. 아브라함을 향한 천사의 움직임은 몇가닥 비스듬한 선으로 그려져 있고, 천사는 아브라함 버리에 손을 얹고 있다. 그러나 이 그림에서는 더 늙어 보이는 아브라함은 아직 그것을 못느끼고 있다. 그는 자기가 하는 끔찍한 일에 그만큼 골몰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무릎이 구부정한 품이 마치 떨리고 있는 게 눈에 선하다. 이 일을 치르고 나면 아브라함은 폐인이 될 것이다.
아브라함과 이사악
1655, 동판화
같은 해(1655년)에 렘브란트는 또다시 이 주제를 다루었다. 사건의 같은 순간을 다룬 것이다. 그러나 여기서는 장면의 외양부터 내면에 이르기까지 모든 것이 전혀 다르다. 이번에는 이사악이 무릎을 꿇고 마음으로부터 순종하는 자세로 아브라함의 품에 안겨 있다. 아브라함은 그를 감싸주는 뜻에서 손으로 눈을 가려주면서 동시에 이사악의 머리를 자기 가슴에 끌어안는다. 렘브란트의 유화에서 얼굴을 눌러 덮던 그림과는 얼마나 다른가. 아브라함의 얼굴의 표정은 무어라 형언할 수 없다. 그러나 천사는 그에게 바싹 다가와 있다. 다른 그림에 비해 어찌나 가까이 있는지 아브라함과 함께 거의 하나의 상으로 융합된다. 그 팔로 뒤에서 아브라함을 그토록 꼭 껴안고 있는 것이다. 위로부터 비스듬히 내려오는 빛은 바로 천사의 제어하는 손을 비추고 있다. 다른 손으로는 아브라함 손을 이사악 얼굴에서 벗기려고 하고 있다. 감싸주는 동작이 이제는 필요치 않기 때문이다. 천사의 발현에서 아브라함을 에워싸는 것은 순수한 사랑인 것이다. 이 조그만 동판화의 발언이 그리는 원, 아비다운 사랑과 충격과 온유한 순종과 하느님 사랑의 원은 엄청나게 넓은 것이다. 미술사가들은 이 그림이 인쇄될 때 뒤집힌 것이 아닌가 하고 묻는다. 아닌게 아니라 아브라함이 칼을 왼손에 쥐고 있는 것이 눈에 띈다. 혹시 렘브란트 자신이 인쇄에 쓸 판에 그림을 제대로 뒤집어 그려넣지 않았는지도 모른다.
하느님의 명령에 따라 사랑하는 아들 이사악을 제물로 바치려고 산을 오르던 아브라함의 마음은 너무도 아팠을 것이다. 아브라함은 결국 하느님께서 진정 원하신 것이 희생 제물이 아니라 당신을 향한 절대적 신뢰와 순종이라는 것을 알게 된다. 만일 내가 이러한 상황에 처했더라면 어떻게 하였을까? 하느님을 원망하고 기도하고 매달렸을 것이다. 그것이 특히 나의 생명 같은 자식이었을 때는 그 투정과 앙탈이 더 심하였을 것이다. 그러나 믿음이라는 것은 앎과 같다. 아브라함을 하느님은 알았기에 믿을 수 있었고 온전히 의탁할 수 있었을 것이다. 나 또한 하느님을 알고 있다. 그러기에 믿고 순종해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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