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의 지혜

지나친 과보호는 보호가 아니라 나약하게 만드는 행위입니다

박남량 narciso 2016. 3. 18. 15:47


지나친 과보호는 보호가 아니라 나약하게 만드는 행위입니다



조선 후기 실학자 이익(李瀷 1681-1763)은 대사헌 이하진(李夏鎭)의 아들로 형 잠(潛)이 당쟁으로 희생되자 벼슬을 단념하고 안산(安山) 첨성촌(瞻星村)에 머물러 일생을 학문에 전념, 유형원의 학풍을 계승하여 실학자의 중조(中祖)가 되었습니다. 그의 문집으로 성호집(星湖集)이 있습니다. 자식을 제대로 사랑하는 방법을 깨닫게 하는 '외눈박이 닭 이야기'가 있습니다.


외눈박이 암탉이 둥지에서 알을 품고 있었습니다. 오른쪽 눈은 완전히 덮였고 왼쪽 눈도 반 이상 실눈이 되어 있었습니다. 앞이 잘 보이지 않아 먹이가 그릇에 가득하지 않으면 제대로 쪼아먹지를 못하였고 이리저리 다니다가 담장에 부딪치기 일쑤였습니다. 그리하여 모두들 이렇게 말하였습니다.

"저래 가지고는 새끼를 기를 수 없다."

마침내 날이 차서 병아리가 나오니 빼앗아서 다른 어미닭에게 줄까 하였으나 한편으로 측은하기도 하여 차마 그러지 못하였습니다. 그런데 얼마 후 다시 살펴보니 그 닭이 별다른 재주가 있는 것도 아니고 항상 뜰 주변을 떠나지 않고 있을 뿐인데 병아리들은 똘똘하게 잘 자라고 있었습니다.

다른 어미 닭들을 보면 대개는 병아리들이 병들고 상처를 받아 죽거나 잃어 버리고 절반도 제대로 기르지 못하는데 유독 이 닭만은 온 둥지를 온전히 길러내니 어쩐 일입니까?

흔히들 새끼를 잘 길러낸다고 하는 데는 두 가지가 있습니다. 먹이를 잘 구해주는 것과 환란을 막아주는 것입니다. 먹이를 잘 구하려면 건강해야 하고 환란을 막으려면 사나워야 합니다.

병아리가 껍질을 깨고 나오면 어미닭은 흙을 부비고 숨어 있는 벌레를 찾아내느라 부리와 발톱이 다 닳아 빠지며 사방으로 흩어지는 병아리들을 불러 모으느라 잠시도 쉴 틈이 없습니다.

또 위로는 까마귀와 솔개, 주위로는 고양이나 개들을 살피며 부리를 세우고 깃을 펄떡여 목숨을 내걸고 항거해야 합니다. 그러다가 때로는 어미 눈을 벗어난 새끼들이 길을 잃기라도 하면 물이나 불 속에 빠져 생사를 분간할 수 없으니 이렇게 되면 먹이를 구해준 것도 환란을 방비하느라 애쓴 것도 다 허사가 됩니다.

그런데 외눈박이 닭은 하나같이 이와는 반대입니다. 멀리 갈 수 없으므로 사람 가까이서 맴돌고 눈으로 살필 수 없으므로 항상 두려운 마음으로 행동을 조심하며 항상 새끼들을 끌어안고 감싸줍니다. 그러므로 힘쓰는 흔적은 보이지 않아도 병아리들은 저희끼리 알아서 먹이를 쪼아먹고 잘 자랍니다.

"사물을 양성하는 방도는 한갖 젖 먹이는 은혜에 달려 있는 것이 아님을 나는 이제야 알겠다. 통솔하되 제각기 제 삶을 이루도록 해야 하니, 그 요령은 오직 잘 인솔하여 잃어 버리지 않는 것뿐이다. 나는 이 병아리 기르는 것으로 하여 사람을 양육하는 도리를 깨달았다."

신체가 불편한 외눈박이 닭은 성한 닭들보다 더 훌륭히 새끼를 키워냈습니다. 지나친 과보호는 오히려 자식을 망치게 하며 그러한 부모들은 자녀의 하녀로 전락하기도 하고 부모의 권위가 손상될 수도 있습니다. 가진 것이 많다 하여 너무 풍족히 주는 것도 역시 자식을 망치는 길입니다. 과보호는 보호가 아니라 그 자체가 나약하게 만드는 행위입니다. 자식을 진정 사랑한다면 한 걸음 떨어져서 지켜보십시오. 다만 시야를 벗어나지 않게 하십시오. 통솔하되 스스로 제 삶을 이루게 하는 것 그것이야말로 자식을 제대로 사랑하는 것입니다. 또한 자식을 온전히 기르는 방법입니다.

성공적인 교육은 윤리적인 능력, 상대방의 처지를 바꾸어 생각해 보고 타인의 가치 틀과 욕구를 이해할 줄 아는 능력, 자신을 더 큰 전체의 한부분으로서 이해할 줄 아는 능력을 키우는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