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 산책

우리 미술관 옛그림 - 정선의 <인왕제색도(仁王霽色圖)>

박남량 narciso 2016. 6. 12. 13:09


우리 미술관 옛그림


정 선(鄭敾 1676 - 1759) <인왕제색도(仁王霽色圖)>


조선 후기의 화가 정선(鄭敾)은 호가 겸재(謙齋)로 우리나라 고유의 진경산수화(眞景山水畵) 화풍을 창시하였으며 뛰어난 진경산수화(眞景山水畵)로서 명성을 날렸습니다. 산수화(山水畵)는 산과 물을 그린 그림이란 뜻입니다. 나무와 바위, 폭포, 호수, 구름, 비바람 등 자연의 풍경을 화폭에 담아낸 그림을 대부분 산수화(山水畵)라고 부릅니다. 진경산수화(眞景山水畵)란 실제 경치를 화폭에 옮기는 화풍입니다. 그 이전의 산수화는 전통적으로 중국과 사대관계 영향으로 대개 중국 고사에 나오는 인물이나 장소 등을 상상해서 그렸습니다.


인왕제색도(仁王霽色圖)는 정선(鄭敾)이 76세 때 5월 하순, 한여름 소나기 후의 인왕산(仁王山 338m) 경치를 지금의 효자동 방면에서 보고 그린 것이라고 합니다. 그의 성숙기 때 그려진 걸작 중의 걸작이라는 평입니다. 정선(鄭敾)은 직접 명승을 찾아 다니며 그림을 그렸습니다.

당시 대부분의 화가들은 큰 바위나 봉우리를 아웃라인만 그려 크고 하얀 공같이 강조를 한 반면
정선(鄭敾)은 넓은 붓으로 짙게 칠해 중량감을 표현하였으며 객관적 사실적으로 그리던 소나무를 몇 개의 짧은 선과 굵은 사선 하나로 간략하게 표현하였습니다.


위쪽의 바위는 시커멓게 비에 젖어 금방이라도 쏟아질 듯 둔중합니다. 화면 아래에 피어오르는 물안개는 가벼운 날개짓처럼 그윽하고 투명하게 보입니다. 거대한 바위 덩어리로 이루어진 돌산 인왕산(仁王山)의 강한 중량감을 어두운 빛깔의 바위와 하얀 안개, 그리고 날렵한 소나무 숲으로 강력한 흑백대비를 시켰습니다.

며칠간 흠뻑 젖은 바위를 먹칠 위에 또다시 먹칠을 하여 적묵기법으로 표현하였습니다. 작은 나무들을 몇 가지와 굵은 선 하나로 얇게 그려낸 화법은
정선(鄭敾)만의 독특한 기법입니다. 비구름에 온통 뒤덮인 산자락에 선명하게 솟은 집 한 채 저 맑은 장지문 너머에는 누가 살고 있을까? 깊은 울림을 주는 그림입니다.


그림 속에는 세 개의 폭포가 맹렬하게 쏟아지고 있습니다. 물안개가 산허리를 휘감을 정도로 많이 피어오르고 있습니다. 정선(鄭敾)은 친구인 이병연(李秉淵)이 사경을 헤매고 있어 회복을 바라는 마음에서 일주일 동안의 긴 소나기 후에 맑게 개인 인왕산 안개 속 세 개의 폭포를 그렸다고 합니다.


최근 미술사학자들은 이 그림 속의 기와집이 북악산 기슭 육상궁 뒷담 쪽에 있던 사천(槎川) 이병연(李秉淵 1671-1751)의 집이라는 사실을 고증해냈습니다. 이병연(李秉淵)은 조선 후기 대시인으로 정선(鄭敾)과는 60년을 함께 한 친구이자 예술세계의 동반자였습니다. 정선(鄭敾)의 시화환상간(詩畵換相看)에 첨부된 我詩君畵換相 看輕重何言 論價間 (아시군화환상 간경중하언 논가간) "내 시와 자네 그림을 서로 바꾸어보니, 그 사이 가치의 경중을 어찌 말로, 논할 수 있겠는가" 글에서 우정을 읽을 수 있습니다.


산수화는 화가의 신분이나 화풍에 따라 남종화(南宗畵)와 북종화(北宗畵)로 나뉩니다. 조선 시대에는 그림을 맡아보는 도화서(圖畵署)라는 관청이 있었습니다. 여기에 소속되어 나라에서 필요로 하는 그림을 그리는 사람을 화원(畵員)이라고 하였습니다. 김홍도, 신윤복, 안견 같은 사람들이 화원(畵員)입니다. 이들이 그린 그림이 북종화(北宗畵)입니다. 남종화(南宗畵)는 주로 사대부 선비들이 그린 그림을 가리키는 말입니다. 그들은 직업 화가가 아니기에 다소 그림이 엉성합니다. 그 대신 그림 속에 얼마나 선비들의 깊은 뜻과 고결한 정신이 깃들어 있느냐를 중요하게 여겼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