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의 지혜

언론삼사(言論三司)와 언관(言官)을 아세요

박남량 narciso 2016. 6. 7. 12:46


언론삼사(言論三司)와 언관(言官)을 아세요



지금은 언론이라는 것이 있어서 국정을 비판하는 기능을 하지만 옛날에는 언관(言官)이 있어 임금과 국정의 잘잘못을 비판하기 마련이었습니다. 조선 시대에 왕의 잘못을 간하고 백관의 비행을 규탄하는 벼슬아치을 일컬어 언관(言官)이라 하였습니다. 그 언관(言官)에 얽힌 이야기입니다.

중국 제나라에 '지와'라는 대부가 있었습니다. 그는 언관(言官)의 직책을 맡고 있었으나 왕의 잘못을 지적하지 않고 그저 적당히 넘기기 일쑤였습니다. 이러는 모습을 보고 맹자(孟子)가 나무랐습니다.

"언관(言官)이란 마땅히 임금의 잘못을 지적하여 시정케 해야 하거늘 그대는 어찌하여 언관(言官)의 직책을 맡은 지 석 달이나 되었는데도 왕에게 한마디 말도 하지 않는가?"

지와는 맹자의 이 말에 느끼는 바 있어 왕 앞에 나섰습니다. 그리고는 그동안 미루고 있던 왕의 잘못을 간했습니다. 그런데 왕은 언관(言官)인 지와의 말을 들은 체도 않는 것이었습니다. 지와는 왕이 언관(言官)의 간언(諫言)을 듣지 않는데 어찌 머물러 있을 수 있겠느냐며 자리를 사퇴하고 말았습니다.

고구려의 관리로 창조리(倉租利)라는 인물이 있었습니다. 왕이 잘못하면 당연히 간해야 할 위치에 있는 몸이었던 것입니다. 당시 왕이 궁궐을 수리하느라고 백성들을 동원했는데 굶주리고 도망가는 자가 속출했습니다. 창조리(倉租利)는 왕에게 간했습니다.

"왕이시여, 지금 백성들이 살 곳을 잃고 먹을 것을 찾아 사방으로 유랑하고 있사옵니다. 그런데도 왕께서는 실정을 무시하고 굶주리는 백성들을 부리시니 이것은 백성의 부모로서 못하실 일이옵니다.심사숙고하소서."

그러나 왕은 창조리(倉租利)의 간언(諫言)을 듣기는 커녕 크게 노해서 말헸습니다.

"무엄하다! 왕은 백성이 우러러 보는 자리인데 궁궐이 장엄하고 화려하지 않으면 무엇으로 위엄을 세울 수 있으리오. 지금 그대는 나를 비방하는 것인가!"

창조리(倉租利)는 당당하게 대답했습니다.

"왕이 백성을 구하지 않는 것은 어질지 못함이요, 신하로서 왕에게 간하지 아니하면 충성스러운 신하가 아니옵니다. 부디 궁궐의 수리공사를 중지하시고 굶주리는 백성들을 구하소서."

왕은 더욱 화를 내었습니다.

"그따위 말을 하지 말라. 다시 그따위 말을 하면 죽고 살아남지 못하리라!"

이에 간언(諫言)을 해도 소용없음을 안 창조리(倉租利)는 자리를 내놓고 물러나고 말았습니다. 이것이 옛날 언관(言官)의 자세였던 것입니다. 간언(諫言)을 하는 충성스런 신하가 물러나자 왕의 주변에는 아부 분자만 늘어나고 모든 일은 왕의 전횡으로 이루어졌습니다. 궁궐을 수리하느라고 국고는 탕진되고 백성들은 아사자가 속출 할 지경이 되었습니다.

보다 못한 뜻있는 군신들이 힘을 모아 왕을 폐하려는 계획을 세우기에 이르렀고 그제야 구원을 청했으나 아무도 왕의 편을 들어 주는 사람이 없었습니다. 아부 분자들도 제 살 궁리에 바빠 재빨리 도망치고 말았던 것입니다. 창조리(倉租利)의 간언(諫言)을 듣지 않은 것을 후회했으나 이미 때는 늦었던 것입니다.

조선시대에 사헌부(司憲府)와 서간원(司諫院) 그리고 홍문관(弘文館)을 합하여 언론삼사(言論三司)라고 하였습니다. 이 기관들은 독자적으로 언관(言官)의 기능을 수행하였지만 국정의 중요한 문제에서는 합의하였습니다.

사헌부(司憲府)는 백관에 대한 감찰·탄핵 및 정치에 대한 언론을 담당하였습니다. 서간원(司諫院)은 왕에 대한 간쟁(諫諍)과 논박(論駁), 정치 일반에 대한 언론을 담당하는 언관(言官)의 기능을 하였습니다. 홍문관(弘文館)은 행정기관이자 연구기관으로 궁중의 서적과 문한(文翰)을 관장하면서 왕의 학문적, 정치적 고문에 응하여 정치기구에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였습니다.

그러나 이 삼사(三司)의 기능이 일정한 세력에 의하여 이용될 때는 국정의 혼란을 피할 수 없게 되는 경우도 있었습니다.
<꽃사진: 낭아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