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의 지혜

시대와 사회를 고뇌해야만 했던 조선의 기인(奇人) 삭낭자(索囊子)

박남량 narciso 2017. 3. 27. 14:57

 
시대와 사회를 고뇌해야만 했던 조선의 기인(奇人) 삭낭자(索囊子)



조선 후기의 문인 담정(藫庭) 김려(金鑢 1770-1821)의 문집(文集)인 담정유고(藫庭遺藁)에 기인담(奇人談)에 관한 이야기가 실려 있습니다. 기인(奇人)이란 성격, 말, 행동 등이 별난 사람을 의미하는 말인데, 기인담(奇人談)은 뛰어난 능력을 갖추었음에도 불구하고 그 능력을 한껏 풀 수 없었던 시대와 사회의 포용력이 아쉬웠다는 동정론을 갖게 하는 이들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불우한 시대를 만나 새끼망태기를 짊어지고 다녔지만 당대 최고의 기인(奇人)이었던 삭낭자(索囊子)의 이야기입니다.

홍씨(洪氏) 성을 가진 거지가 있었습니다. 그는 새끼를 얽어 망태기를 만들어서  다닐 때엔 메고 밤이 되면 반드시 그속에 들어가 잠을 잤습니다. 그런 까닭에 스스로 삭낭자(索囊子)라 이름하였고 남들도 그렇게 불렀습니다.

몸이 칠 척이나 되는 거구였지만 아름다운 수염을 지니고 있었고 얼굴은 빙옥같이 희고 맑아 그의 용모에 감탄하지 않는 사람이 없었습니다. 그는 사람들이 나이를 물으면 '스무 살이오'하고 대답하였습니다. 그 다음 해에 또 누가 물어도 '스무 살이오'하고 대답할 뿐이었습니다.

이렇게 세월이 흘러도 변하지 않는 그의 나이처럼 삭낭자(索囊子)의 얼굴은 조금도 늙지 않았습니다. 그는 다 헤어진 베잠방이를 입고 나막신을 달달 끌면서 서울 근처를 돌아다니며 곡식을 구걸하였고 혹시 얻은 것이 많은 날이면 다른 거지에게 나누어주었습니다.

그는 평생 남과 이야기하기를 좋아하지 않았을뿐더러 남의 집에 묵지도 않았습니다. 그는 대식가일 뿐 아니라 주량까지 커서 여덟 말의 쌀로 밥을 지어 먹어도 배가 차지 않았고, 두어 항아리의 술을 마셔도 어지럽지 않았습니다. 그러면서도 한 달을 계속해서 먹지 않아도 역시 허기진 적이 없었습니다.

그의 바둑 실력은 당대 최고였지만 남과 승부를 다투지 않았습니다. 사대부들이 그를 집으로 불러 바둑을 두게 하면 그중 제일 고수와 두어도 한 집만을 이기고 또 가장 낮은 이를 상대해도 한 집만을 이길 뿐이었습니다. 그러므로 이 무렵에 바둑어 두어 한 집만을 이기면 이를 가리켜 삭낭자의 기법이라 하였습니다.

그는 추위를 잘 견디어서 한겨울에 눈보라가 치고 얼음 얼어 새와 짐승들이 모두 얼어 죽는 날씨라도 벌거벗은 채 서 있을 뿐 아니라 시냇가 바위 사이에 온 몸을 뻗은 채 누워서 닷새 동안을 졸다가 일어나면 땀이 흘러 발등에 떨어졌습니다.

남들이 옷을 주어도 받지 않았으며 억지로 주면 다른 비렁뱅이에게 주었습니다. 어떤 사람이 수십년 뒤에 관서 지방의 어느 길에서 삭낭자(索囊子)를 만났는데 그 옛날과 다름이 없었다고 합니다.

역사 속의 숨은 이야기를 읽고 배우는 것은 역사 속에 숨겨져 있던 진실들을 제대로 알고 그들의 지혜와 그들의 삶을 살펴보아 오늘날의 지혜로 활용할 수 있기 위해서입니다. 삭낭자(索囊子)는 불우한 시대를 만나 새끼망태기를 짊어지고 다녔지만 명문의 후예로 태어나 문장에도 능했지만 집안에 재앙(家禍)을 만나자 스스로 세상을 피했습니다.

어찌 삭낭자(索囊子) 뿐이겠습니까? 조선 후기의 풍자 시인이자 방랑 시인 속칭 김삿갓으로 널리 알려진 김병연(金炳淵 1807-1863)도 머리에 삿갓 하나를 얹어 놓고 천하를 방랑하였으며, 천지의 이치를 깨달았던 조선 중기의 학자이며 기인(奇人)인 토정(土亭) 이지함(李之菡 1517-1578)도 결국은 벼슬을 버리고 낙향하였습니다.

조선 초기의 문인이자 학자인 생육신의 한 사람인 매월당(梅月堂) 김시습(金時習 1435-1493)은 세조의 세상이 틀렸음을 보고 스스로 미치광이 행세를 하였습니다. 중국의 현자(賢子)인 공자(孔子)도 한때는 조국인 노(魯)나라를 떠나야 했습니다.

이들은 말 그대로 산다는 것 자체가 기이한 일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들이 기이하기만 한 사람들이 아니었습니다. 단지 그들은 높은 꿈과 열정을 지녔으며 삶에 대한 믿음으로 가득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들은 글 힘은커녕 입심조차 없어 입을 앙다물고 세상과 시비를 따질 생각을 하지 않았습니다. 시대와 사회는 뛰어난 그들의 능력을 포용하지 않았던 것입니다. 지금 살아가는 우리 또한 기인이 아닐까요.<꽃사진: 티파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