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의 묵상

기다릴 줄 아는 지혜가 필요합니다

박남량 narciso 2016. 3. 14. 14:35


기다릴 줄 아는 지혜가 필요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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五峰集 이호민>



조선 중기 이호민(李好閔 1553-1634)이라는 학자가 있었습니다. 그가 이조좌랑(吏曹佐郞)으로 있을 때는 임진왜란이 나자 왕을 모시고 의주로 피했고 그후 중국에 가서 명장 이여송의 군대를 끌어들이는 외교에 크게 기여하여 좌찬성(左贊成)까지 역임했습니다. 그의 시문집인 오봉집(五峰集)에 "병이 났을 때 어떤 의사를 찾아가는 게 좋겠느냐고 나에게 묻는다면 나는 단연코 늙은 의사를 찾아가라고 권하겠다."라는 글이 있습니다.

나이가 많은 의사가 있었습니다. 어느 날 그 의사에게 갑이란 이가 황급히 달려와 다급한 어조로 이렇게 말했습니다.

"우리 부모님의 병환이 여차여차한데 어떻게 하면 고칠 수 있겠습니까?"

그 의사는 조금도 동요하는 기색 없이 처방을 지어주며 덤덤하게 말했습니다.

"이대로 약을 한번 써 보시오."

갑이 그 처방을 살펴보니 그것은 다른 의사들의 처방과 하나도 다를 것 없는 흔하디흔한 처방이었습니다. 갑은 떨떠름한 얼굴로 돌아와서 화를 내면서 사람들에게 말했습니다.

"우리 부모님의 증세가 위급해서 다급하게 달려갔는데 그저 이 약이나 한번 써보라는군."

갑은 그렇게 투덜거리면서도 별다른 방도가 없자 어쩔 수 없이 그대로 약을 썼습니다. 과연 예상했던 대로 차도가 없었습니다. 갑은 그 약을 모두 내다 버리고 다른 의사를 찾아 나서기로 하였습니다.

갑이 시장에 나가보니 마침 어떤 의사가 좌판을 벌리고 앉아 있었습니다. 그 의사는 얼굴 생김새도 번 듯하고 말은 청산유수였으며 금궤(金櫃)와 옥함(玉函)에 든 의서(醫書)를 좌우로 벌려놓고 인삼이니 복령이니 백출이니 하는 약재를 좌판 앞에 죽 늘어놓고 있었습니다. 그 의사는 갑에게 이렇게 말했습니다.

"먼저 쓴 약은 엉터리니 빨리 약을 바꾸시오. 그렇지 않으면 삼일도 못 넘길 거요."

그리고는 자신의 의술을 떠벌리는데 천지와 자연의 조화를 넘나들고 음양과 오행의 이치를 주워섬겼습니다. 그의 말을 들어보면 마치 물이 솟구치고 산이 내딛는 듯하여 천하의 명의인 장중경(張中景)이나 유원빈(劉元賓) 같은 이들도 미치지 못할 정도였습니다. 마음이 흡족해진 갑은 돌아와서 사람들에게 말하였습니다.

"오늘에야 훌륭한 의원을 만났으니 우리 부모님의 병은 고친 거나 진배 없네."

그리고는 그 의원이 지어준 처방대도 약을 지어 부모에게 잡수시게 하였습니다. 그런데 그 약을 복용한 부모는 정신이 가물가물하면서 가슴이 점점 답답해졌습니다. 두세 차례 더 복용하자 증세는 더욱 심해졌습니다. 그리하여 갑은 나에게 글을 보내 이렇게 물었습니다.

""지난 번 늙은 의사의 처방은 잘 듣지는 않았지만 그래도 해는 없었습니다. 그런데 시장에서 만난 떠돌이 의원은 말은 그럴싸한데 그의 처방대로 약을 쓰자 병이 더 심해졌습니다. 어째서 그렇습니까?"

그래서 나는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큰 지혜는 한 곳으로만 파고들지 않고, 지극한 도(道)는 평범한 가운데 있는 것이네. 그리고 경험이 많은 사람이라야 그러한 이치를 아는 법이네. 자네가 늙은 의사에게 부모님의 증세를 말하였을 때 그도 인간인데 어찌 애처로운 생각이 들지 않았겠나? 그런데도 그런 기색을 보이지 않고 덤덤하게 말한 것은, 그 의사가 이미 갖가지 병을 치료하면서 충분한 경험을 쌓았기 때문일세.

그 의사는 병의 증상을 들으면, 병의 원인이 무엇인지 또 그 병이 앞으로 어떻게 진전될 것인지 이미 다 알고 있다네. 그리하여 먼 데까지 바라보면서 처방을 내리는 것이지 그 늙은 의사의 처방은 겉으로 보기엔 간단하지만, 속에는 깊은 이치가 담긴 것으로 한 번 복용해서는 효험을 볼 수가 없네. 자네는 어찌 두 번 세 번 그 약을 쓰지 않고 곧바로 바꾸어 버렸는가? 그 늙은 의사의 약은 비록 당장에 효험을 보진 못했을 지라도 사람을 맹랑하게 죽이는 일은 결코 없을 것이네."

이호민(李好閔) 학자의 시문집 오봉집(五峰集)에 실린 글입니다. 기다릴 줄 아는 지혜가 필요함을 깨우치게 하는 글입니다. 늙은 의사는 그것을 잘 알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갑은 그것을 몰랐습니다. 너무 빨리 얻으려 하면 정석이 아닌 사술(邪術)에 의지하게 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