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를 보지 않고도 믿는 사람은 행복하다
성서의 요한복음에 나오는 말씀입니다. 이 말씀은 예수의 제자 중 토마스가 예수의 부활을 믿지 못하겠다면서 『나는 그분의 손에 있는 못 자국을 직접 보고 그 못 자국에 내 손가락을 넣어 보고 또 그분 옆구리에 내 손을 넣어 보지 않고는 결코 믿지 못하겠소.』하고 말하는 데서 시작됩니다.(요한 20,25)
여드레 뒤에 제자들이 집 안에 모여 있었다. 토마스도 그들과 함께 있었다. 예수님께서 오시어 가운데 서시며『네 손가락을 여기 대 보고 내 손을 보아라. 네 손을 뻗어 내 옆구리에 넣어 보아라. 그리고 의심을 버리고 믿어라.』라고 이르신 후에『너는 나를 보고서야 믿느냐? 보지 않고도 믿는 사람은 행복하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요한 27-29)
토마스의 이야기를 읽고 있으면 우리 현대인은 토마스와도 같다는 생각이 듭니다. 토마스는 현대적 합리주의자 즉, 본능(本能)이나 감각적인 느낌에 의존하지 않고 인간이 지니는 사고력(思考力), 이성(理性)이라는 것에 바탕을 두어 논리적으로 생각하여 사물을 처리하려는 태도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러한 합리주의와 실증주의적 교육을 받은 우리에게는 토마스적인 발상이 뿌리 깊게 남아 있습니다.
그러나 신앙은 사상이 아닙니다. 종교는 사람의 마음속 가장 깊은 곳에 있는 무의식에서 우러나오는 것입니다. 병사들이 전쟁 중에 죽어갈 때 만세를 부르짖는다고 하지만 어머니라고 외치며 숨을 거둔 병사들이 더 많다고 합니다. 그 어머니라는 중얼거림이 바로 마음속 깊은 곳이 무의식 세계에서 나온 본심(本心)입니다.
사상과 종교는 그러한 차이가 있습니다. 참된 신앙이란 합리주의와 이치를 넘어서는 것입니다. 불교(佛敎)에서도 이를 일컬어 언어도단(言語道斷)이라 말하고 있습니다. 언어도단(言語道斷)이란 「말로는 도저히 표현할 수 없는 심오한 진리」라는 말입니다. 그래서 예수님도 『보지 않고도 믿는 것』이 참된 믿음임을 말하는 것이 아닐까요.
예수님이 부활하였다고 말하면 많은 사람들은 이를 되살아남과 혼동하여 생각합니다. 그러나 부활은 지상의 존재 형태로 되돌아오는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하느님은 예수님을 당신에 의해 부여된 생명의 권능과 영광에까지 올려놓으셨습니다. 그러한 생명은 어떤 수식도 없는 절대적인 생명입니다. 부활이란 우리를 살아 있게 하고 우리를 포함하고 있는 저 거대한 생명으로 돌아가서 그 안에 사는 것을 말합니다(묵시 1,17-18).
이 거대한 생명을 불교신자(佛敎信者)들은 선(禪)을 통해 몸으로 느낍니다. 그리고 그것을 깨달음이라 부릅니다. 깨달음을 초월한 생명체가 되는 것을 부활이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언어도단(言語道斷)의 경지는 「깨달음의 경지」를 일컫는 말입니다. 이렇듯 사상은 언어와 분석에 의지하는 사고로 설명할 수 있지만 종교는 그러한 사고로는 설명할 수 없습니다. 지혜로 충만한 마음을 만드시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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