털 신
숲정이 같던 개나리 울타리가 잎을 다 떨어내 가지들만 얼기설기했습니다.
빈 외양간에 있는 구유가 쓸모없이 귀퉁이에 처박혀 있는 것이나, 흙벽에 걸린 멕고모자가 먼지를 뿌옇게 쓰고 있는 것이나, 손끝이 닿았던 때가 오래되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할머니는 툇마루에 앉아 멀리 산봉우리를 바라보았습니다.
깊은 주름이 매서운 추위에 아릴 것만 같아 보입니다. 그때 할머니의 큰 아들이 마른 장작을 잔뜩 지고 와 부엌에 부렸습니다.
"올 겨울엔 내려온다고 하셨잖아요. 근데 왜 또 딴소리를 하세요?"
큰 아들은 아궁이에 장작을 가득 넣고 풀무를 돌리며 툴툴댔습니다. 할머니는 꼬부장 앉아 장작 쌓는 일에만 마음을 둘 뿐 아무 대꾸가 없었습니다.
"죽었는지 살았는지 ....... 연락도 없는 놈을 뭣 하러 기다리시냐고요!"
화를 내는 큰아들 말 속에 울컥하는 모습이 비쳐졌습니다.
'너도 나이 오십을 훌쩍 넘겼으니, 부모 마음을 알테지.' 할머니는 큰아들의 그 마음을 읽었습니다.
집을 나서는 큰아들의 얼굴은 장작불에 달아올라 아직 불그레했습니다.
"내일은 더 춥다네요. 불 많이 땠으니 방 따뜻할 거예요."
할머니는 큰아들 뒷모습을 보며 미안한 마음이었습니다.
"지척에 두고 살면서, 노모를 홀로 놔두다니!"
동네 사람들이 험담을 하며 혀를 차도 변명 한 마디 없이 묵묵한 큰아들이 한편 고맙기도 했습니다. 큰아들 네는 식솔이 장성하다보니 방 두 칸뿐인 집이 솔아, 볼품은 없어도 아랫마을에 너른 집을 구해 이사했습니다. 그때가 3년 전입니다.
그런데 할머니가 이집에 혼자 남겠다고 고집 부린 데는 속내가 있었습니다. 지금은 나이 사십 중반이 되어 버린 애물단지 장가 못간 막내아들 때문입니다.
"청춘의 반을 교도소에서 보냈으니 어디에 간들 환영을 받겠어."
마을 사람들은 물론 친척집 수대로 눈살을 찌푸린 뒤로 막내아들은 연락을 끊고 소식이 없습니다.
"망할놈의 자슥, 한평생 태어나 참하게 잘 살 것이지, 어쩌자고 죄를 지어 사람 노릇도 못하고 어미 가슴에 대못을 박았을꼬. 이 추운 겨울에 어디서 제대로 먹고는 있는지."
할머니는 막내아들이 원망스럽다가도 금방 가슴이 아파옵니다.
'동네사람들 눈에 띨까봐 한밤중에 왔던 게야. 어려운 걸음 해서 왔으면 이 어미는 보고 갔어야지.'
언젠가 밤에 막내아들이 집 앞에서 서성이는 걸 봤다는 이웃 사람의 말을 들은 뒤 할머니는 눈물을 지었던 적이 있습니다. 그래서 집을 비워두면 잠든 밤에 막내아들이 왔다가도 알 길 없을 걱정이 할머니 마음을 이집에 붙들어 놓은 겁니다. 그날부터 할머니는 혹시나 편지라도 오지 않을까 눈 빠지게 기다리는 마음이 되었습니다.
큰아들은 그런 할머니의 마음을 읽고는 낡어 빠진 편지함을 버리고 새로 만든 편지함을 흑 벽에 다시 걸어 놓았습니다.
"내가 집에 없어도 막내한테 편지가 오면 우체부 양반이 여기다 넣고 가는겨?"
할머니는 다른 말이 필요 없습니다. 그저 막내아들 얘기 뿐입니다. 큰아들은 말없이 고개만 끄덕였습니다.
그런데 얼마 만인가 꿈처럼 막내아들이 편지를 보낸 겁니다.
"살았구마. 어이구 살았 있었구마."
편지를 뜯는 할머니 손이 덜덜 떨렸습니다. 얼마나 반가운지 돋보기를 찾는 것도 허둥댔습니다.
'엄마, 어디 편찮으신 데는 없어요?.......'
할머니는 막내아들이 편지지에 쓴 첫 줄을 더듬더듬 읽었습니다.
"네 얼굴 한 번만 보면 있던 병도 나을 거구마."
할머니는 편지지에 대고 말했습니다.
'엄마, 불효자식으로 살아 죄송합니다. 곧 찾아뵐게요.'
서두르듯 맺어 버린 막내아들의 짤막한 편지가 할머니의 마음을 더욱 아쉽게 했습니다.
"이놈아, 곧 온다는 말이 대체 언제쯤인겨."
할머니는 편지지에 대고 꾸짖었습니다.
"막내한테 편지 좀 해봐라."
할머니는 큰아들에게 당장 독촉을 했습니다. 하지만 편지를 보낼 수가 없었습니다. 어디에 사는지 주소를 적지 않은 편지였기 때문입니다.
할머니는 편지를 들고는 원통해 했습니다. 그러고는 더 큰 시름에 잠긴 얼굴로 앉아있었습니다.
'그 놈의 자슥, 보고자파 하는 어미 마음을 그렇게 모르다니.'
막내아들은 금방 올 것 같이 한마디 해 놓고선 2 년이 지나도록 또 캄캄 무소식이었습니다.
"어머니, 이젠 더 이상 혼자 계시게 할 수 없어요."
할머니 몸은 큰아들의 말을 더 이상 거절 할 수 없을 만큼 쇠약해졌습니다.
큰아들은 할머니 옷가지며 자질구레한 물건들을 챙겼습니다.
"며칠만 있으면 설인데 그날까정만 있게 해 주련."
할머니가 큰아들 눈치를 보며 한마디 했습니다.
"이 몸으로 그믐 추위를 어떻게 넘기시겠어요!"
큰아들은 버럭 화를 냈습니다.
"어서 여기 앉으세요."
큰아들은 할머니를 부축해 푹신한 솜이불이 깔린 손수레에 태웠습니다. 그러고는 목도리로 할머니 눈만 내놓고 동였습니다. 손수레 바람에 날리던 흰 머리카락 멱 가닥이 할머니 눈물에 붙었습니다.
설을 하루 앞둔 날이었습니다. 할머니는 온종일 살던 옛집에 마음이 가 있었습니다.
'빈집이라 냉골 일 텐데.'
할머니는 막내아들이 올지도 모른다는 기대감에 작년 설처럼 가슴이 울렁거렸습니다. 마음 같아선 달려가서 군불을 때놓고 싶었지만 그조차 할 수 없음이 가슴만 탔습니다. 마음 초가들이 온종일 내린 눈에 덮여 대문만 내놓고 있었습니다.
설날 이른 새벽에 일어난 할머니는 솜버선을 신고 새끼줄로 고무신과 발등을 한 바퀴 돌려 맸습니다. 혹시라도 눈길에 미끄러져 넘어지면 큰일이기 때문입니다. 할머니는 밤 새 꽁꽁 언 눈 위를 징검다리 건너듯 살살 걸었습니다. 하얗게 내린 눈이 새벽길을 밝혀 주었습니다.
'혹시 밤새 왔다가 빈집이라 그길로 간 것은 아닐 런지."
마음 같아선 한걸음에 닿을 것 같아도 한 없이 더디기만 했습니다. 이른 새벽길인데도 사람들 발자국이 벌써 있었습니다. 설 쇠러 오고간 사람들이려니 생각했습니다.
빈집에 다다른 할머니 눈이 커졌습니다.
"웬 발자국이여?"
집을 드는 길섶부터 큼직큼직한 발자국이 집안으로 들어간 것입니다. 가슴이 너무 뛰어서 허리를 펴고 긴 숨을 한번 내쉬었습니다.
'야가 정말 왔나 보네.'
토방까지 짧은 걸음인데도 숨이 턱에 닿았습니다.
"어이구 잘 왔다. 내, 너 올 줄 알았다."
할머니는 환한 얼굴로 방문을 열었습니다. 그러나 방안에는 냉기만 휑하니 아무도 없었습니다.
"어디 갔니?"
할머니는 혼잣말을 하며 부엌을 들여다보았습니다.
그런데 누가 불을 때고 있었습니다. 할머니의 가슴은 더욱 방망이질을 했습니다. 그러나 다시 보니 막내아들이 아니고 큰아들이었습니다. 할머니가 한숨을 쉬며 주저앉았습니다. 큰아들이 군불을 때며 눈물을 훔치고 있었습니다. 할머니가 허망해 하는 모습을 본 것입니다.
할머니 얼굴엔 어느새 눈물이 주름을 타고 번졌습니다. 큰아들이 할머니를 부축해서 막 싸리문을 나설 때였습니다. 막내아들이 비닐봉지 한 개를 손에 들고 문앞에서 고개를 숙이고 있었습니다.
"야가 누고?"
할머니는 막내아들 손을 잡으려고 양 팔을 뻗었습니다.
"엄마.....!"
막내아들은 얼른 다가가 할머니를 꼭 안았습니다. 비닐봉지가 떨어지면서 털신 두 짝이 하얀 눈 위에 흩어졌습니다. 할머니 털신이었습니다. 큰아들은 돌아서서 눈물을 훔쳤습니다.
성모기사/201210/최은순 아네스/원죄없으신 성모기사외/사진은 웹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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