숙종과 갈처사의 이야기가 있는 명릉
서오릉은 서쪽에 다섯 개의 능이 있다하여 붙여진 이름인데 이 능에는 경릉, 창릉, 익릉, 명릉, 홍릉있다. 왕실의 가족묘를 이루고 있는 능이다. 이 능 중에서 명릉은 숙종과 계비 인현왕후 민씨와 제2계비 인원왕후 김씨를 모신 능이다. 숙종과 인현왕후는 나란히 쌍분을 쓰고 인원황후의 능은 옆에 따로 같은 언덕에 모셨다. 숙종은 왕비를 세 번 맞아들였는데 원비 인경왕후는 서오릉 안 익릉에 따로 모셔져 있다. 숙종은 후궁으로 경종을 낳은 장희빈과 영조를 낳은 숙빈 최씨를 두었다. 숙종시기에는 정치세력의 기복이 심하고 붕당정치의 정쟁이 격심하였지만 숙종은 왕권을 강화하고 상평통보를 주조하고 백두산에 정계비를 세우는 등 치적을 남긴 왕이다. 명릉에는 이 능의 자리를 잡아준 갈처사의 이야기가 전해져 온다.
숙종 임금이 백성을 살피러 다니다가 시냇가를 지나가는데 한 시골 총각이 관을 냇가에 두고 슬피 울며 땅을 파는게 아닌가. 숙종이 의아해서 물었다. " 아무리 가난한들 물가에 묘를 쓰는가?" " 어머니가 오늘 아침에 갑자기 돌아가셨는데 갈처사라는 지관이 이곳이 명당이라고 일러 주었는데 땅을 팔수록 물만 나오니 속이 탑니다." 숙종은 엉뚱한 곳을 명당이라고 일러준 지관이 괘씸하고 총각의 처지가 불쌍했다. 궁리끝에 그 자리에서 몇 자 적어 주며 총각더러 관청에 가서 전하라고 했다. 관청 사람들은 서찰을 받고 발칵 뒤집혔다. 높고 높은 임금의 어명이었던 것이다. 관청에서는 편지에 쓰인대로 총각에게 쌀 삼백 가마와 명당 자리를 내주었다.
한편 숙종은 평범한 선비 행세를 하고 갈처사를 찿아 갔다. " 그대는 무슨 연유로 상을 당한 총각더러 냇가에 묘를 쓰라 했소? 불쌍한 사람을 골탕 먹여도 유분수지." " 아무것도 모르면서 웬 참견이요? 그 땅은 시체가 들어 가기도 전에 쌀 삼백 가마를 받고 명당으로 가는 땅이야." 깜짝 놀란 숙종은 좀더 예의를 갖춰 물었다. " 그렇게 땅을 잘 보는 사람이 왜 허름한 곳에 사시오?" " 또 모르는 소리. 여기는 나랏님이 찿아 올 명당이란 말이요. 가만 내가 작년에 받아 놓은 날이 있는데....앗!" 상황을 파악한 갈처사는 임금 앞에 엎드렸다. 그 뒤 숙종이 명을 다하자 갈처사가 숙종의 능 자리를 잡아 주었다. 그곳이 서울 서오릉에 자리한 명릉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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