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의 지혜

산이나 바다 어디에도 숨길 곳은 없다

박남량 narciso 2014. 5. 12. 08:55



산이나 바다 어디에도 숨길 곳은 없다







네 형제의 바라문이 있었다.
그들은 모두 다섯 가지 신통력이 있어 국왕의 스승이었다.
그러나 일주일 후에는 자신들이 죽을 것을 미리 알고 있었다. 그들은 서로 의논했다.

"우리에게는 다섯 가지 신통력이 있어 하늘과 땅을 뒤집고 해와 달을 어루만지며 산을 옮기고 강물을 흐르지 못하게 하는 등 못하는 일이 없다. 그러넫 어째서 이 죽음만은 피할 수 없단 말인가?"

한 바라문이 말했다.
"나는 큰 바다 속에 들어가 바닥까지 내려가지 않고 중간에 머물러 있겠다. 아무리 죽음의 살귀(殺鬼)라 한들 어떻게 내가 있는 곳을 알 것인가."

또 한 바라문은 말했다.
"나는 수미산(히말리야) 속에 들어가 그 표면을 합쳐 틈이 보이지 않게 하련다. 아무리 죽음의 살귀(殺鬼)라고 내 있는 곳은 모를 거다."

한 바라문은 이렇게 말했다.
"나는 허공으로 높이 올라가 거기에 은신하고 있어야지. 죽음의 살귀(殺鬼)라고 어쩔 수 없을거야."

또 다른 바라문은 말했다.
"나는 큰 시장 복판에 숨어야겠다. 죽음의 살귀(殺鬼)가 와서 한 사람을 붙들 때 하필 나를 찾을 리는 없겠지."

이와 같이 그들은 각기 숨을 곳을 말하고 나서 왕에게 하직을 고했다.
"우리들의 수명을 헤아려 보니 앞으로 이레밖에 남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그 죽음을 피하려고 각기 길을 떠나기로 했습니다. 죽음에서 벗어난 뒤  돌아와 뵙겠으니 왕께서는 부디 덕으로써 나라를 다스리십시오."

그들은 왕궁을 떠나 저마다 자기가 숨을 곳으로 갔다.
그러나 이렛날이 되자 그들은 모두 죽고 말았다. 그것은 마치 과일이 익어 제물에 떨어지는 것과 같았다.

시장 감독이 왕에게 아뢰었다.
"어떤 바라문이 시장 한복판에서 갑자기 죽었습니다.
왕은 스승인 바라문임을 알아보았다.
"네 사람이 죽음을 피해 각기 딴 곳으로 떠났는데 벌써 한 사람이 죽었도다. 그 나머지 세 사람인들 어찌 죽음을 면할 수 있으랴."

왕은 곧 수레를 준비하여 부처님께 나아가 예배하고 말씀드렸다.
"바라문 네 형제가 있었습니다. 그들은 모두 다섯 가지 신통력이 있어 자기들의 목숨이 이레 뒤로 임박한 것을 미리 알고 저마다 죽음을 피해 길을 떠났습니다. 그들이 과연 죽음을 면할 수 있겠습니까?"

부처님은 말씀하셨다.
"사람으로서는 면할 수 없는 네 가지 일이 있소.
첫째는 중음(中陰)으로 있으면서 생(生)을 받지 않을 수 없고
둘째는 한번 태어났으면 늙지 않을 수 없고
셋째는 늙어서는 병들지 않을 수 없고
넷째는 이미 병들었으면 죽지 않을 수 없소."

허공도 아니고 바다속도 아니어라 산속도 아니고 바위 틈도 아니어라
죽음을 벗어나 은신할 곳 그 아무데도 있을 수 없네

이것은 힘써야 할 일 내가 할 일 나는 이 일을 성취해야 한다고
사람들은 그 때문에 초조히 오가면서 늙고 죽음의 근심을 밟고 다니네

이런 줄 알아 스스로 고요하고 생사가 이미 끝났음을 알았다면
그는 악마의 손에서 벗어난 것 비로소 생사의 강을 건너게 되리.


법구비유경 무상품(法句譬喩經 無常品)에 실린 이야기로 '인연(因緣)이야기'(法頂, 佛日出版社, 1991)에서 옮겨 나눕니다.
무상(無常)이란 말은 단순히 덧없고 허무하다는 뜻이 아니다. 모든 존재는 생멸(生滅) 변화하면서 잠시도 같은 상태로 머물지 않음을 가리킨다. 그러므로 무상(無常)이란 말의 본 뜻은 변한다는 것. 모든 것이 변하지 않고 그대로 있다면 오히려 큰 일이 벌어질 것이다.

변하기 때문에 거기에 가능성이 있다. 변하기 때문에 창조적이고 의지적인 노력을 기울임으로써 얼마든지 개선될 수가 있다. 육신(肉身)의 무상(無常)함을 알고 침울해 할 것이 아니라, 그러기 때문에 아무렇게나 살지 말고 시시(時時)로 거듭 나면서 후회없이 알차게 살아야 한다는 뜻이다. 유기체인 육신(肉身)은 영원하지 않지만 법신(法身)은 무상(無狀)하지 않고 상주(常住)하므로 청전한 법신(法身)을 구현해야 한다는 것이 불타 석가모니의 가르침이다.

중음(中陰)이란 중유(中有)라고도 하는데 의식을 지닌 중생(衆生)이 죽음의 순간인 사유(死有)로부터 다음 생(生)을 받는 생유(生有)까지의 중간 시기를 말한다. 이 기간이 49일이라는 설이 있기 때문에 죽은 사람을 위해 49일 동안 명복을 빌고 재(齋)를 지내는 풍습이 생기게 된 것이다.

죽음은 육체에 있어서 가장 큰  최후의 변화라고 톨스토이는 강조하며 우리들은 지금까지 육체의 변화를 경험에 왔으며 또 지금도 경험하고 있는 중이라고 했습니다. 그러면서 다음과 같이 말했습니다.
"우리들은 한 개의 살덩어리였다. 다음에 젖먹이 어린아이가 되었다. 그리고 머리털과 이가 나왔다. 그것이 탈락되고 다시 새로운 이가 갈려 나왔다. 그러나 또한 이번에는 백발이 되고 대머리가 된다. 그것은 확실한 변화이다. 그러나 이러한 변화들을 우리들은 겁내지 않는다. 그런데 어째서 우리들은 이 최후의 변화인 죽음을 겁내는 것일까?"

플라톤의 주장을 들어본다.
"인간은 육체와 불사(不死)의 영혼으로 이루어져 있다. 인간에 깃들여 있는 불사(不死)의 영혼은 본래 이데아(Idea)의 세계에서 태어났으며 그 세계에 있다가 어느 날부턴가 육체라는 질곡에 갇히게 되었다. 따라서 우리 인간의 영혼은 깊은 사색과 회상을 통해서 본래의 고향, 다시 말해서 영원한 통찰의 왕국을 떠올릴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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