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깥 사물과 자아의 구별이 없는 세계를 강조한 말 고사성어 호접몽(胡蝶夢),장주지몽(壯周之夢)
장자는 꿈 속에서 나비가 되었다. 다음날 아침 그는 매우 우울해 있었다. 그의 친구는 물었다. "무슨 일인가? 우리들은 자네가 그토록 우울해 있는 것을 본 적이 없네." 장자가 말했다. "나는 당황해 어쩔 줄을 모르겠네. 나는 도대체 이해할 수가 없다네. 밤에 자는 동안 나비가 된 꿈을 꾸었네." 친구들은 웃음을 터뜨렸다. "누구도 꿈 때문에 그처럼 괴로워하지는 않네. 자네가 꿈에서 깨어났으면 꿈은 이미 사라졌는데 왜 그토록 고민을 하는가?" 장자가 말했다. "그것이 문제가 아닐세. 내가 지금 당황하고 있는 것은 만약 내가 꿈 속에서 나비가 될 수 있다면, 거꾸로 나비가 잠이 들어 장자가 된 꿈을 꾸고 있을 수도 있는 걸세. 내가 꿈 속에서 나비가 될 수 있다면 왜 그 반대가 불가능하겠는가? 나비도 꿈을 꾸어 장자가 될 수 있지 않겠는가? 장자가 꿈을 꾸어서 나비가 되었는지, 나비가 지금 장자가 된 꿈을 꾸고 있는 것인지 도대체 무엇이 진실인가?"
미하일 비트쉬어의 철학 오디세이에 실린 글로 장자가 꿈에 나비가 되어 즐겁게 놀았다는 이야기로 장주지몽(壯周之夢)이다. 즉 호접몽(胡蝶夢)이다.
다시말하면 장자는 이렇게 말했다. 언젠가 내가 꿈에 나비가 되었다. 훨훨 나르는 나비였다. 내 스스로 아주 기분이 좋아 내가 사람이었다는 것을 모르고 있었다. 이윽고 잠을 깨니 틀림없는 인간 이었다. 어떻게 인간인 내가 꿈에 나비가 된 것일까. 아니면 나비가 꿈에 인간인 나로 변해 있는 것일까. 인간 장주와 나비와는 분명코 구별이 있다. 이것이 이른바 만물의 변화인 물화(物化)라는 것이다. 장자는 또 하늘과 땅은 나와 같이 생기고 만물은 나와 함께 하나가 되어 있다고 말했다. 그러한 만물이 하나로 된 절대의 경지에 서 있게 되면 인간인 장주가 곧 나비일 수 있고 나비가 곧 장주일 수도 있다. 꿈도 현실도 죽음도 삶도 구별이 없다. 우리가 눈으로 보고 생각으로 느끼고 하는 것은 한낱 만물의 변화에 불과한 것이다. 바깥 사물과 자아의 구별이 없는 세계를 강조한 말이다.
여기에서 유래되는 고사성어가 호접몽(胡蝶夢)이다.
장주지몽(壯周之夢)이라고도 한다. 호접몽(胡蝶夢) 또는 장주지몽(壯周之夢)은 나비의 꿈이라는 뜻이다. 인생의 덧없음을 비유하여 사용하고 있지만 본래의 뜻은 보다 철학적인 의미를 지니고 있다. 인생관과 우주관을 동시에 말해 주는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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