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민왕 과 이성계의 등장
삼별초의 몽고군에 대한 저항은
4 년간이나 계속되었지만 거의 전멸되어
뜻을 이루지는 못했으나 나라를 지키려는
호국정신 즉 우리 민족의
자주 정신을 잘 보여 주었다.
고려가 굴복하자 몽고는 이 땅에
몽고의 관청을 두고 고려의 관제를 낮추었다.
고려 왕의 맏아들을 볼모로 몽고에 데려가고
왕은 몽고의 공주를 왕비로 맞아야 했다.
이리하여 충렬왕 이후
31대 공민왕에 이르기까지 고려 임금들의
몸에는 몽고인의 피가 흐르게 되었다.
충렬왕 때부터 고려 임금을 충정왕이니
충해왕이니 하면서 충자를 넣어 부르는 것은
몽고에 충성하라는 뜻이었다.
그리고 백성들의 이름도 몽고식으로 짓게
했으며 식생활도 몽고식을 따르게 했다.
시집가는 색시가 머리에 족두리를 쓰는 일이나
이마와 볼에 연지 곤지 찍는 것도
모두 몽고 풍습에서 비롯된 것이다.
고려의 정치가 간신들의 손에 놀아나
매우 어지러운 때 충숙왕에 이어
공민왕이 임금 자리에 올랐다.
공민왕은 어려서부터 몽고에서 자랐기 때문에
몽고의 사정에 밝았다.
몽고 황제의 딸 노국공주를 아내로 맞아
임금이 되어 고려로 돌아온 왕은
고려의 자주 운동을 벌여 고유의 풍습과
영토를 되찾는 개혁정치를 펼쳤다.
최영장군은 빼앗긴 고려의 영토를
압록강 서쪽의 땅부터 차례차례 되찾았다.
동북쪽에 있는 쌍성을 공격할 때의 일이다.
이자춘은 고려 군사가 몽고군을 쫓아내기
위해 왔다는 소식을 듣고
아들 이성계를 시켜 성문을 열게 했다.
그래서 쌍성은 피 한 방울 흘리지 않고
되찾게 되었다. 이 공으로 이자춘이
병마사라는 벼슬을 받게 되었으며
이자춘이 세상을 뜨자 그 아들 이성계가
벼슬을 그대로 물려받게 되었다.
조선 500 년 역사를 연 이성계가
이렇게 역사의 무대에 첫 모습을 드러냈다.
공민왕은 고려의 영토를 하나하나 회복하여
고구려 광개토대왕시절의 기세를 펴는 듯했다.
공민왕의 개혁정치는 백성의 환영을 받았지만
반발들도 많았다.
1356년 노국공주가 아기를 낳다가 숨을 거두자
그때부터 공민왕은 모든 일에 의욕을 잃게 되고
개혁정치는 실패의 길을 걷게 되었다.
결국 궁중 음모가 일어나 공민왕은 암살되었으며
홍건적의 침입과 왜구의 노략질로
고려는 서서히 황혼을 맞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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