꽃과 설화

겸손한 들판의 잔디

박남량 narciso 2006. 3. 21. 09:35
겸손한 들판의 잔디


 



하늘과 땅이 생겨난 지 얼마되지 않았을 때입니다
아직 질서가 바로 잡히지 않아 모두가 제멋대로였습니다.
하느님은 하루빨리 질서를 바로 잡아야겠다고 생각하여
해에게 따스한 봄볕을 내려 쬐도록 명령하였습니다.
해는 부드럽고 고운 햇살을
산과 들에 고루고루 내렸습니다
이제 봄이니 새싹이 나고
고운 꽃이 피겠지 생각하였는데
질서가 바로 잡히지 않은 탓에
구름이 느닷없이 소나기를 퍼부었습니다.
깜짝 놀란 해가 구름을 타일렀습니다.
구름아, 지금은 봄이니까 봄비를 내려야지.
구름은 해가 타이르자 심술을 부려 장대비를 뿌렸습니다.
그러자 땅에서는 큰일이 벌어졌습니다.
강물이 넘치고 둑이 무너졌습니다.
산사태로 마을은 쓸려 내려가고 돋아나던 새싹들은
홍수에 휩쓸려 자취도 없이 떠내려가 버렸습니다
해는 하느님께 사실대로 알렸습니다.
그렇지 않아도 구름 때문에 걱정을 하고 있었다.
비가 필요없을 때는 비를 마구 뿌리고
풀과 나무들이 기다릴 때는
물 한 방울도 내려주지 않아서
모두 말라죽게 하는 심술꾸러기 아닌가 하면서
구름을 불러들였습니다.
구름은 꾸중을 듣고
다시는 그러하지 않겠다고 했습니다.
하느님은 봄의 천사를 불러
땅으로 내려가서 홍수로 허물어지고 찢어진 땅을
치료하라고 일렀습니다.

 

 


땅으로 내려 온 봄의 천사는
허물어진 산에는 나무를 심고  꽃도 피웠습니다.
할 일은 너무도 많았습니다.
홍수가 휩쓸고 간 들판을 푸르게 치료하는 일은
너무도 힘에 겨웠습니다.
그래서 봄의 천사는 고운 꽃을 피우는 꽃들에게
부탁하기로 하고 찾아갔습니다.
먼저 튤립을 찾아갔습니다.
"얘, 튤립아! 홍수에 휩쓸려 폐허가 된 마을에 가서
꽃을 피워주지 않겠니? 너는 색깔이 고우니까
슬픔에 잠긴 마을 사람들에게 큰 즐거움이 될 거야."
"흥, 뭐라고요?
누가 저렇게 더러운 곳에 꽃을 피운담.
임금님의 궁전 같은 곳이라면 몰라도"
튤립은 콧 방귀를 뀌면서 쌀쌀 맞게 거절했습니다
봄의 천사는 아무 말도 못하고 돌아섰습니다
이번에는 모란꽃을 찾아갔습니다.
모란아! 너에게 부탁이 있는데 들어주겠니?"
"무슨 부탁인지 말해 보세요."
"홍수가 휩쓸고 간 들판이 너무 쓸쓸하구나.
네가 거기에 꽃을 피워준다면
참 아름다운 들판이 될 거야.
들판에 가서 살아주지 않겠니?"
"아이 참! 기가 막혀.
나더러 저렇게 메마른 들판에 가서 살라고요?
큰 부잣집 뜰이나 선비들이 모이는
정자 같은 곳이라면 몰라도
그런 곳에 가서 꽃을 피우면
이 우아한 모습을 누가 보아주겠어요?"
모란은 자기의 우아한 모습을 자랑하며
머리를 흔들었습니다.
봄의 천사는 이번에는 장미꽃을 찾아갔습니다.
"장미야,
너도 알다시피 지금 이 땅은 홍수에 휩쓸려서
빨리 치료해주지 않으면 안 된다.
저렇게 터진 둑과 들판을
네가 아름다운 꽃을 피워주지 않겠니?"
"뭐라고요? 나를 어떻게 보고 그런 말씀을 하세요.
나는 이 나라 임금님의 부름을 받을 몸이에요.
둑이나 들판에 피어서
남의 구경거리가 되라고요? 싫어요."
장미꽃은 얼굴이 새빨개지도록 화를 냈습니다.
봄의 천사는 슬픈 표정으로
모래땅에 힘없이 주저앉았습니다.
그때입니다.
어디 선가 작은 말소리가 들려왔습니다.
"봄의 천사님!
아무도 그 일을 하지 않겠다면 저희들이 해보겠어요.
저희들은 그들처럼 아름답거나
사람들의 사랑을 받지는 못하지만
허물어진 땅을 푸르게 덮어 줄 수는 있을 것 같아요."
봄의 천사가 소리 나는 곳을 돌아보니
거기에는 눈에 잘 뛰지도 않는
조그만 잔디들이 겸손한 자세로 서 있었습니다.
"오! 너희들은 잔디가 아니냐?
저 쓸쓸하고 거칠어진 들판을
너희들이 푸르게 가꾸어 주겠니?"
"천사님께서 허락만 해주신다면 노력해 보겠어요.
무엇이든지 시켜 주십시오."
"그래, 들판이든 산 기슭이든 어느 곳이나 찢어지고
헐벗은 땅은 모두가 너희들의 몫이다.
어서 풀 한 포기 없는
저 들판부터 덮어 주도록 하려무나."
그래서 잔디는 들판과 산기슭 어느 곳이나
다른 풀과 나무가 자라지 않는 곳이면
푸르게 덮어 잔디밭을 만들게 되었습니다.
잔디의 꽃말은 희생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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