추상으로서의 신
그리스도교에서는 신을 그림이나 조각으로 나타내는 것은 흔히 볼 수 있다. 그리고 예수가 십자가에 걸린 그림 역시 흔히 볼 수 있는 것으로 되어 있다. 신을 추상으로서가 아니라 구상으로서 언제나 바라보는 것이 되고 있다.
그러나 유태인은 일체의 우상 숭배를 거부한다. 유태교에서는 하느님을 사람처럼 그린 경우는 한 건도 없다. 하느님은 언제나 추상의 영역에 있으며 구상할 수 없는 신으로 유태인은 훈련하고 있다. 이 일이 사물을 논리적 추상적으로 생각하게 하는 계기를 주고 있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아이들에게는 눈으로서는 볼 수 없지만 존재하는 신에 대해서 생각하는 것이 지적 자극이 된다는 것이다.
유태인의 아이들에게 이야기하는 유태인 아브라함의 우화이다. 아브라함은 그의 아버지가 우상을 만들어 파는 것을 보면서 자라났다는 데서 이야기는 시작된다. 아브라함은 아버지가 작업장에서 만든 아무것도 아닌 우상을 사람들이 사 가지고 가서는 하느님으로 공경하는 것이 이상하고 궁금했다. 이것이 계기가 되어 아브라함은 하느님이란 무엇이냐에 대해 생각하기 시작한다.
아버지가 만든 우상이 신일 까닭이 없다. 그렇다면 신은 태양일까? 달일까? 여러 가지로 생각을 해 보았다. 그러나 태양은 일몰과 함께 사라지고 달은 해가 뜨면서 없어져 버린다. 그러므로 하느님은 달이나 태양이 아니라 더 뛰어난 것임에 틀림없다고 결론을 짓는다. 마침내 아브라함은 하느님이란 물질이 아니라 정신이라는 데에 생각이 이른다. 아브라함은 인류로서 처음으로 신에 대한 추상적인 개념을 얻은 셈이다. 아브라함은 결국 자기 아버지가 만든 우상을 파괴하면서 우상은 말도 못하고 움직일 수도 없고 걸을 수도 없는데 어째서 그것이 하느님이냐? 우상을 예배하는 것은 거짓이다 하고 선언한다.
유태인의 아이들은 이 이야기를 들으면서 아브라함의 체험을 마음 속으로나마 체험하면서 추상적인 사고력을 길러간다. 그리고 추상의 중요성을 직관적으로 알게 된다. 유태민족은 높은 추상적 사고력이 요구되는 학문이나 사업에 수많은 인재를 배출해냈다. 유태인의 아이들에게 있어서는 신은 추상적인 사고력을 길러주는 원동력이 되고 있으며 사고력을 보다 활발하게 활동시켜 주는 에너지의 원천이 되고 있다.
우리의 아이들에게 추상적인 일을 가르치는 것은 매우 어려운 교육과정의 하나일 것이다. 종교에 대하여 물으면 무신론자라고 말한다. 대화의 지루함이 싫어서 하는 대답이 많다. 그러나 사람들은 어떤 형태로든 종교를 가지고 있다. 그래서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도 신에 대해서 기도를 하고 있는 것이 아닐까. 그렇다면 필요한 것은 신을 의식화하는 것이다. 신에 대해 생각하는 일이 추상적 사고의 계기가 되게끔 해 보는 것이다. 천재교육을 위한 길임에 틀림없을 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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