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의 나라 노예가 될 수 없다며 망국후 장터에서 칼 꺼내 자결한 최후의 내시 반학영
국립 대전현충원 애국지사 제2묘역에 반하경이라는 인물이 안장돼 있다. 그는 철종부터 고종, 순종까지 조선의 마지막 3대 임금을 모신 내시다. 어떤 내시였기에 국립묘지에 묻히게 됐을까. 묘비에는 순국선열 반하경의 묘라고 기록되어 있다. 족보와 옛 비석에 나오는 이름은 반학영(潘學榮)인데 일제 때 반하경으로 잘못 기록되었다고 한다. 조선일보에 실린 글을 옮겨 우국지사의 충절을 나눕니다.
반학영은 일제의 핍박이 심해진 을사조약이 체결되자 내시를 그만두고 경기도 파주 집으로 내려갔다. 1910년 경술국치로 국권을 잃었다는 소식이 전해졌다. 그는 일주일 내내 음식먹기를 거부한 뒤 파주 삽다리 장터에 나가 사람들 앞에서 유서를 꺼내고 자결했다.
" 나라가 망하면 신하도 망하는 것이다. 내가 죽어 민영환 충정공, 여러 충신과 함께 지하에서 임금을 섬길테니 수천만 동포는 혈심(血心)으로 단결하라" 반하경이 남긴 유서의 내용이다. 그의 시신은 인근에 살던 동료 내시들이 거두었다.
자손이 없던 그의 행적이 세상에 드러나고 파주 내시촌 인근에서 그의 묘와 비석을 확인했다. 비석에는 1852년 철종 때 12세 나이로 궁에 들어와 50여년 일하면서 내시 중 가장 높은 종1품 숭록대부까지 올라갔다고 기록되어 있고 성품에 대해서는 청렴해 박봉으로 살림을 꾸려나갔으며 동료라도 임금의 총애를 믿고 제멋대로 하면 발길을 끊었다. 그는 한일합병이 된 지 1주일 뒤 남의 나라 노예가 될 수 없다며 길가에서 칼을 꺼내 자결했다고 적혀 있다.
자결한 사연이 담긴 이 비석은 일제시대 때이지만 덕을 기리는 글이 없어 옛 동지들이 그의 큰 충절이 드러나지 않을까 두려워해 세운다며 반학영의 동료 내시 13명이 충신 내시를 기억하자며 돈을 모아 일제 탄압에도 불구하고 과감하게 세웠던 것이다.
비석의 글과 글씨를 쓴 이들도 예사롭지 않다. 글은 반하경처럼 한일합병에 반대해 자결한 형조판서 김석진의 아들인 김영한이었다. 현대 명필로 유명한 김충현, 응현의 할아버지이다. 글씨는 이조판서를 지낸 당대 명필 윤용구가 썼는데 일제가 남작 작위를 주려고 하자 거부한 우국지사였다. 반학영은 1962년 대한민국건국훈장 독립장을 받았다. 아무도 돌보는 이 없어 황폐해진 반학영의 무덤은 국립묘지로 이장됐고 비석은 전남 장성으로 옮겨졌다. 장성 어느 곳으로 옮겨졌는지 장성군 홈페이지에는 그러한 사실의 기록이 보이지 않는다.
- 조선일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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