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의 묵상

사람의 마음속에 덕이 충만하면 그 덕이 자연스럽게 드러납니다

박남량 narciso 2017. 11. 8. 14:03


사람의 마음속에 덕이 충만하면 그 덕이 자연스럽게 드러납니다



인격은 사람의 격식을 뜻하는 낱말입니다. 한 사람이 이룩한 사람됨을 뜻하는 말입니다. 우리가 이룩한 사람됨에 따라 고매한 인격의 소유자로 살아갈 수 있고 그렇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18세기 문단의 핵심인물인 혜환(惠寰) 이용휴(李用休 1708-1782)의 혜환잡저(惠寰雜著)에 실린 <해서개자(海西丐者)>라는 글입니다.

영조(英祖 1694-1776) 십칠년(1741년)에 나라에 큰 흉년이 들었습니다. 길에는 배가 고파 아우성치는 사람들이 즐비하였습니다. 하루는 혜환(惠寰) 이용휴(李用休)가 서당에서 형을 모시고 옛일을 이야기하고 있는데 웬 거지가 와서 짐을 내리고 담에 기대어 앉았습니다.

거지의 행색은 늙고 초라했지만 얼굴에는 무언지 모를 고상한 기품이 흘렀습니다. 이용휴(李用休)의 형(兄)이 물었습니다.
"이보시오. 영감, 당신은 비록 허름한 옷을 걸치고 거지 노릇을 하고 있으나, 보아하니 미천한 부류는 아닌 듯하오. 혹시 시골 양반이 아니시오?"

그러자 거지가 대답했습니다.
"아니올시다. 저는 그저 비천한 농부일 뿐입니다. 어찌 감히 속이겠습니까?"

이용휴(李用休)의 형(兄)이 다시 물었습니다.
"그럼 애초부터 살림살이가 없었소? 어찌하다 이 지경에 이르렀소?"

거지는 한숨만 거듭 쉬다가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자식놈이 관청 광산을 맡았다가 돈을 탕진하고, 세금이 올라서 모든 재산을 다 팔아 갚고 나니 빈털털이가 되고 말았습니다. 게다가 흉년마저 들어서 늙은 놈이 이렇게 사방을 돌아다니며 빌어먹을 따름입니다."

때마침 초여름이어서 복숭아가 잘 익어 있었습니다. 몇 알을 따서 노인에게 주었더니 노인은 다 먹은 후에 조용히 말했습니다.
"옛 사람이 말하길, 과실을 먹고 사는 이는 건강하게 오래 살 수 있다고 하였습니다. 이치에 맞는 말이지요. 제가 어렸을 때 시골에서 최모 어른께 글을 배운 일이 있었답니다. 그 어른은 도덕과 행실이 높고, 또 글을 잘 해 향시(鄕試)에 장원을 하였답니다.

그러나 도시에는 나가지 않고 산으로 들어가 풀집을 짓고 제자들을 가르쳤습니다. 그분의 아우와 조카는 저와 가장 가깝게 지내는 사이였습니다. 저희는 가끔 숲 속에 들어가서 과실을 따 먹었답니다. 그러자 선생이 농으로 말씀하셨습니다.
"너희는 늙지 않는 방법을 찾는 모양이구나. 과실 먹기를 그리 좋아하느냐?"

이제 하찮은 제 나이가 여든이 거의 차오고 두 취군도 모두 저보다 몇 살씩 위이지만 아직까지 아무런 병이 없으니 그때 선생의 말씀은 깊은 의미가 있었던 듯합니다. 그러나 저 같은 자는 기갈이 타고난 천성을 해쳤을 뿐더러 제 몸이 욕되어 조상들에게 누를 미치고 천지조화로부터 곤욕을 받은 자인 만큼 아무리 나이를 많이 먹은들 무슨 복이 따르겠습니까?"


이 이야기의 거지 노인은 비록 궁하고 늙어 죽게 되었으나, 인간의 참된 바탕을 잃지 않고 있습니다. 이것이 어디 쉬운 일이겠습니까? 혜환(惠寰) 이용휴(李用休)는 그러한 거지 노인에게서 인간적인 신뢰를 느끼고 있습니다. 뿐만 아니라 그 스승의 고매한 인격까지 유추하고 있습니다. 그리하여 이야기 끝에 이렇게 이야기를 달고 있습니다.

"고매한 선비는 덕행을 숨기고 벼슬을 탐하지 않기에 아는 자가 없다. 그리하여 저 거친 들판, 산골짜기에 숨은 선비나 촌에서 논밭을 갈고 사는 사람 중에 고매한 사람이 있다."

장자(莊子)의 덕충부(德充符)에도 이와 비슷한 이야기가 있습니다.  위(魏)나라에 애태타(哀駘它)라는 이름을 가진 아주 못생긴 곱추가 살았습니다. 그는 거의 말이 없이 늘 남의 말을 들어줄 뿐이었습니다. 아무런 권력도 갖고 있지 않아서 남의 목숨을 살려준 적도 없으며, 쌓아 놓은 재물도 없어서 남의 배를 채워준 적도 없었습니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그를 한 번이라도 만난 사람들은 두고두고 그를 그리워했으며, 그를 한 번이라도 본 여인들은 다른 사람의 부인이 되느니 차라리 그의 첩이 되겠노라 하였습니다. 그에게는 배려(配慮)와 겸손(謙遜) 그리고 겸양(謙讓)의 덕(德)이 있었습니다.

이처럼 고매한 인격이란 사람의 외모나 지위에 달린 것이 아니라 그것은 깊디깊은 마음속에서 알게 모르게 흘러나오는 것입니다. 사람다운 사람이 되기 위해 인격을 도야하는 것입니다. 사람다운 사람이 되는 일이 혼자의 힘만으로 되는 것이 아닙니다. 서로 돕고 살펴주어야 합니다. 그리하여 또한 알게 모르게 세상을 비추는 것입니다.<사진: 창녕 관룡산 관룡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