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사 성어

실패를 경험한 뒤 지나치게 조심한다는 고사성어 징갱취제(徵羹吹薺)

박남량 narciso 2017. 5. 10. 14:37



실패를 경험한 뒤 지나치게 조심한다는 고사성어 징갱취제(徵羹吹薺)




중국 전국시대(戰國時代) 말엽, 진(秦)나라에 대항할 수 있는 세력은 초(楚)나라와 제(齊)나라 두 나라뿐이었다. 그래서 진(秦)나라 재상 장의(張儀)는 초(楚)나라와 제(齊)나라 동맹의 강화론자(强化論者)인 초(楚)나라의 삼려 대부(三閭大夫) 즉 소(昭) 굴(屈) 경(景) 세 왕족의 족장(族長)을 일컫는 굴원(屈原 BC343?∼277?)을 제거하기로 작정하고 기회를 노렸다.

어느 날, 초(楚)나라 회왕(懷王)의 후궁들이 굴원(屈原)을 몹시 싫어한다는 정보가 들어왔다. 장의는 곧 후궁들을 매수하여 굴원(屈原)에 대하여 왕의 신임을 잃게 만들었다. 드디어 굴원(屈原)이 실각을 하자 장의(張儀)는 초(楚)나라로 찾아가 회왕(懷王)에게 제(齊)나라와 단교하면 진(秦)나라의 국토 600리를 할양하겠다고 제의했다.

그래서 회왕(懷王)은 제(齊)나라와 단교했으나 장의(張儀)는 약속을 이행하지 않았다. 속은 것에 회왕(懷王)은 분을 참지 못해 진(秦)나라로 쳐들어갔다. 그러나 대패하고 도리어 접경 지역의 국토까지 빼앗겼다. 회왕(懷王)은 지난 일을 후회하고 굴원(屈原)을 다시 등용했다.

그 후 10년이 지난 어느 날 진(秦)나라의 사신이 찾아와 회왕(懷王)을 진(秦)나라로 초청했다. 굴원(屈原)은 믿을 수 없는 진(秦)나라의 초청에 반대했으나 왕자 자란(子蘭)의 강권에 진(秦)나라에 갔다가 포로가 되어 그 이듬해 타국에서 세상을 떠났다.

초(楚)나라에서는 태자가 왕위에 오르고 동생인 자란(子蘭)이 재상이 되었다. 굴원(屈原)은 회왕(懷王)을 죽음에 이르게 한 자란(子蘭)에게 책임을 물었으나 이는 도리어 참소(讒訴)를 당하여 조정에서 쫒겨났다. 이때 그의 나이는 46세였다.

굴원(屈原)처럼 뛰어난 인재를 받아줄 나라는 많았지만 충성스러운 굴원(屈原)은 망명도 하지 않고 10년 동안 나라를 걱정하며 한결같이 동정호(洞庭湖) 주변을 방랑하다가 울분이 복받친 나머지 동정호(洞庭湖) 남쪽을 흐르는 멱라(汨羅)강에 몸을 던져 수중고혼(水中孤魂)이 되었다. 이후 사람들은 굴원(屈原)의 넋을 '멱라의 귀[汨羅之鬼]'라 일컫고 있다. 충신을 홀대한 초(楚)나라는 얼마 지나지 않아 멸망하였다.

초(楚)나라의 노래라는 뜻인 초사(楚辭)라는 책에 실려 있는 굴원(屈原)의 작품 중 '석송(惜誦 )'이란 시(詩)의 한 구절이다.
"懲於羹者 而吹薺兮(징어갱자 이취제혜) 何不變此志也(하불변차지야) 뜨거운 국에 데어서 냉체까지 불고 먹는데 어찌하여 그 뜻을 바꾸지 못하는가"

이 시(詩)는 방랑 시절에 씌어진 것으로  주군(主君)을 생각하고 충성을 맹세하는 선비가 없음을 슬퍼하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뭇 사람들로부터 소외된 것을 분노하며 어쩔 수 없는 고독을 한탄하면서도 그 절조만은 변절하지 않겠다는 강개지심(慷慨之心)을 토로한 시(詩)이다.


굴원(屈原)의 '석송(惜誦 )'이란 시(詩)에서 유래되는 고사성어가 징갱취제(徵羹吹薺)이다.

징갱취제(徵羹吹薺)란 뜨거운 국에 데어서 냉채를 불어 먹는다는 뜻으로 실패를 경험한 뒤 지나치게 조심하는 것을 비유하는 말이다.<꽃사진: 망종화>